제68호, 2025년 1월호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1970년대에는 한국 기독교가 한창 왕성하게 부흥되던 때였다.
교회마다 새벽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산 기도회 산마다 기도원이 있었고 부흥회도 많이 했었다. 온통 부흥의 물결이 넘쳐났다. 그때 크게 은혜받은 찬송가 중 하나가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지금도 내 귀에는 쟁쟁하게 들린다. 그때 막 교회 나가면서 이 찬양을 많이 부르고 좋아했던 것은 초신자인 나에게는 큰 결심을 하게 해주었다. 술과 담배를 너무 좋아했고 주초가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매일 일과 속에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오산리 금식기도원이 그때는 천막을 쳐놓고 그 안에서 바닥에 앉아 예배드리고 기도를 했는데 예배 때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고 병 고침과 방언 은사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개 역사가 일어나니 예배만 드리면 은혜가 충만해지고 평안과 기쁨이 물밀듯이 밀려와 이곳이 천국이구나 착각할 정도였다. 매월 2~3번은 기도원에 가게 되고, 금요 기도회는 삼각산으로 능력 받는다고 다녔는데 인천서 시청 앞까지 전철로 와서 택시 타고 평창동까지 가서 걸어서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간다. 밤 11시 정도 되면 여기저기 떼를 지어서 몰려온다. 그야말로 기도깨나 한다는 꾼들이다.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면 환상이라도 볼까 꿈이라도 꿀까 해서 사모하는 마음은 언제나 충만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립다. 한국 강산은 은혜의 강산이요. 교회는 은혜가 넘쳐났고 모이면 기도 얘기, 전도 얘기, 예수 얘기가 전부였다. 시기적으로 나는 좋은 때에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주위에 신앙이 좋고 은혜로운 분들이 많아서 지속적으로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은혜도 능력도 많이 받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공부를 늦은 나이에 시작하고 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일 교통비 점심값 등록금 책값 등 정말 은혜와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공부였다. 은혜와 신학은 완전히 달랐다. 한번은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학생과장이 교실에 들어와서 호명하는 학생 일어서라고 해서 나도 일어서고 내 친구도 일어섰는데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10여 명이 나와서 서로 물어보는데 등록금을 안 낸 학생을 불러낸 것이었다. 물론 못 낸 것이었지만 등록금 내고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내 친구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갔는데 나 보고 몇 번이나 돌아가자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때 그 친구 말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도 나에겐 뾰족한 무슨 수가 없으니까, 학교 운동장을 지나서 그 친구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수업하고 있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뒷자리에 죄인 된 기분으로 앉아서 책을 꺼내서 펴고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오산리 기도원, 삼각산 기도를 다니면서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습관처럼 부르는 찬양을 생각하며 결코 돌아서지도 가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간 그 친구는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그러나 참고 인내했던 나에게 하나님은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게 해주셨고 내가 개척할 때는 우리 학교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60평 교회에 자동차, 피아노, 성구 일체에다 성도가 50~60명이 모이고 교단의 감독님, 학장님과 교수님들과 전교생이 다 와서 축하해주고 축복해 주었다. 정말 영광스러웠다.
금년도 신년 감사 예배드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창19:26-롯의 처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다.
뒤를 돌아보거나 머물러서지 말고 산으로 도망 하여 멸망치말라는 말을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농담으로 들었을까. 새해에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전진 또 전진하자.
조연화 목사 / 순복음경향교회
부제: 얀바르퀴니 새 이번의 오키나와 여행에서 주님께서 들려주고 싶은 새 이야기가 있었다. 결코 날지를 못하는 새, 걸어 다니는 새,
그 새를 보혈 새라고 가슴으로 불러본다. 부리와 발가락이 새빨간, 일반인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새이다
2004년 일본 열도를 밟으며 그 땅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보름 여정으로 삿포로 북단에서 가고시마, 배 타고 쓰시마섬까지 기도 여행을 계획하고 간 적이 있었다. 쓰시마섬에의 정자에서 일본 열도를 위로 바라보는 철야기도를 위해 만 오천 원을 주고 모기 방충망을 샀다.
“주님, 삿포로부터 가고시마의 쓰시마까지 일본의 부흥을 주소서, 삼십 만 명의 순교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고 있어요. 사꾸라 꽃처럼 활짝 부흥이 꽃피게 해 주세요.”
처음 두 살 된 딸아이를 업고 철야기도를 시작했을 때 주님은 “딸아, 일본을 위해 기도해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일 년 육 개월 매일 5시간씩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일본에 가서 유치원을 해서 아이들을 전도할까 하여 3년간 ‘국제 몬테소리 자격증’을 위해 일본에 왔다 갔다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소나무 향이 진동하는 사가현 ‘가라스 여관’에 한 달간 투숙하며 후쿠오카 유치원에서 실습을 받았다.
그때 여관 꼭대기에 있는 여탕 탈의실 다다미에서 새벽 1시경 혼자 눈물범벅이 되어 기도했던 기억과 김이 서려 있던 유리를 통해 본 산언덕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주님은 일본 땅, 유치원이 아닌 신학교로 인도하셨다. 1998년 종로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3년간 “일본선교센터”로 그나마 섬길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일본을 생각하면서 교회를 개척했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일본을 향하신 주님의 마음이 언제나 살고 있다.
2016년 주님은 안식년을 명하시며, 교회를 성도들에게 맡기고 무조건 일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결국 300년 전, 삼십만 명이 순교한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38,000명의 크리스천이 전원 순교한 시마바라섬과 하라성터, 순교하기 위해 귀를 자르고 피를 흘리며 걸어간 이틀간의 숨겨진 길을 찾기에 이르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 년 동안 그 길을 찾기 위해 시마바라에 다섯 번이나 들어갔다. 갈 때마다 일주일을 머무르며 샅샅이 찾은 덕에 운젠 순교지와 시마바라 구석구석까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17년부터 3년간 “시마바라 순교 순례”를 위한 가이드를 했다. 그해 미션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콜지오 감독은 엔도슈사쿠의 “침묵”이란 소설을 25년간 각색하여 “침묵”, “Silence”란 영화가 상영되었다. 다행히 영화 줄거리는 순교한 크리스천의 고문과 신앙을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가이드를 하는 동안 그 영화는 설명이 부족한 나를 위해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공간을 초월한 영화 동역자를 주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이다.
왜 일본이라면 삿포로와 가고시마까지 생각했을까? 오키나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최근 교회 청년이 “목사님, 일본기도 하실 때 삿포로부터 오키나와까지 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질문을 해왔다.
오키나와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오키나와 땅을 밟고 기도해야만 되겠구나.
유월에 남편과 함께 찾아왔다. 제일 먼저 최남단 마부니곶의 ‘평화기념공원’을 찾아갔다. 비가 계속 내렸고 한국 사람은 전혀 보이질 않고 일본 학생들이 역사교육을 위해 많이 와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한국인 위령탑. 태평양 전쟁 때 징집된 미소년들과 위안부 소녀들, 만 명의 죽음을 기리는 위령탑 뒤로 큰 돌무덤이 있다. 한국에서 직접 돌들을 가져와 쌓았다고 한다. 돌비엔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이은상 시인의 시비가 외롭게 서 있다. 발아래 새겨진 큰 화살표는 방향이 한국을 향하고 있다. 얼마나 한국 땅이 보고 싶고 그리웠을까. 주로 땅굴 파는데 동원되어서 해도 보지 못한 채, 곡괭이질 하며 굶어 죽어간, 위안부로 끌려 온 대한의 아들과 딸들. 서러움이 복받치니 빗소리조차 눈물겹다.
길을 건너오니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어간 미군 병사 일만 사천 명, 일본 32사단의 칠만 육천 명, 한국인과 오키나와 시민이 무려 이십 만 명에 달한다. 죄다 까만 돌비에 새겨 평화의 파도라 명하며 세워놓았다.
150년 전만 해도 “류쿠”왕국이었던 이곳의 시민들은 총알받이가 되어 1/3이 죽어갔다. 소년들은 수류탄을 품고 미국 군인들에게 다가가 천황의 이름으로 자결토록 고무시켰다.
오키나와섬은 전쟁의 마지노선이 되어 무려 삼십만 명이 죽음으로 희생된 것이다. 오키나와가 이렇게도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니, 해안 절벽 가득 부서져 내리는 파도까지 눈물을 머금고 애도하는 것 같다. 오키나와란 이름조차 밧줄을 바다에 묶어놓았다는 뜻이니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도시의 이름에 녹아있다.
다음날 관광버스로 합류하였다. 나서기 전 ‘아하브’책자와 휴지 전도 용품을 챙기며 받게 될 한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여전히 비는 여우 봄 날씨처럼 오락가락한다. 고르지마 섬과 츄라우미 수족관을 거쳐 미군기지 곁의 아메리칸 빌리지까지 다녀오는 코스다.
일본인 남편에게 시집와서 삼십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으나, 아들 대학 학비에 보태고자 일일 가이드를 한다는 그녀는 아직도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일 층엔 시부모님을 모시고 자신은 이층에 산다고 한다. 아직도 한국 국적을 고수하는 것은 죽고 나서 한국에 뼈를 묻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다. 일본까지 와서 힘든 시집살이를 하는 그녀가 너무 대단해 보였다. 그래, ‘이 사람이야.’라며 전도 용품과 책자를 전했다. 한국에 어머니가 권사님이신데 늘 “이것아, 아무리 바빠도 꼭 교회에 가라”고 하신다며 웃으며 받으신다.
그분이 갑자기 오키나와에만 있는 천연기념물 새가 있다며 ‘얀부르퀴니’란 새를 언급하신다.
발음이 어려워 세 번이나 물어보았다. 까만 새인데 보기도 힘들 뿐 아니라, 날지 않고 걸어 다니는 새라니 너무 신기했다. 혹시 보게 되면 복권을 사서 자기에게 주고 가라며 농담까지 곁들인다. 이상하게도 새 이름을 듣는데 가슴이 뛰었다.
오키나와 최북단에 살고 있는 부리와 발가락은 새빨갛고 나머지는 까만 바탕에 하얀 비늘 같은 선이 연결된 모양새다
일본 열도의 땅 밟기 기도가 끝나는 오키나와 기도에서
처음으로 들은 ‘얀부르기니’
땅으로 걸어 다녀 만나기도 힘든 새
날지도 못하는 새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찾지도 않는 새
부리와 발가락이 새빨간 새
어쩌면
날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 새
천국의 소식을 전하기까지 날지 못하는 소명새,
보혈 새
주님. 제가 보혈 새가 되어도 좋을까요?.
오키나와에서 마지막 주님께 건넨 기도를
주님은 어떻게 받으실까.
첫사랑 고백하듯 가슴이 마구 뛴다.
유지용 / 양주정암교회
너를 생각하면 마음
깊이 작은 불이 켜져
차가운 바람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너의미소 너의 목소리
내 하루 속에 살며시 스며들어와
거리를 거닐 때면
어디선가 네가 손을
잡아줄 것만 같아
그 따스함을 잊지 않으려
매일 네 생각에 마음을 적신다.
아득한 별처럼 멀리 있어도 그 빛은
언제나 나를 비추네
이 마음 닿을 때까지
나는 끝없이 너를 그리워하리
나선진 / 밀양시민교회
‘Jesus wept.(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이 두 단어는 내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완전한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우리를 위로하고 공감하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고통과 슬픔 가운데에 있을 적에 함께 울어주시고, 우리를 돌이켜보사 공감하며 애통해하는 하나님임을 말해준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말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내가 믿는 교회는 사랑이다. 연대와 공감이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거나 무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파하고 슬퍼할 때, 곁에 와서 함께 울어주고, 토닥여 주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공감하기에 앞서 판단한다. 이념과 사상을 들이밀며 우리 편이 아닐 경우 가차 없이 내팽개친다. 울든 말든 내 편들과 세력 결집하기에 바쁘다. 이 시대에 아파하며 우는 자들이 누구인가. 우리는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중립이 아닌 편 들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약자와 돌봄이 필요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문제들에 빠져 정작 우리에게 맡겨진 지상명령을 애써 무시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말이다.
누가 울고 있는가. 바로 그날, 세월호에서 쓰러져간 단원고 학생들은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다. 바로 그날, 이태원의 청년 중 내 친구도 있었다. 사고사로, 사회적 타살, 자살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들과 함께 울어주지는 못할지언정 교회가 그들을 욕보이는 현실을 보면서 분노했다. 참 쉽게 선 긋고 정죄하며 내치는 그 모습은 결코 교회가 아니라 생각한다.
슬퍼하는 이들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신 예수님,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을 정죄하며 우리의 거룩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긍휼히 바라보며 함께 울어주는 모습, 그들 가운데서 곁을 지켜주며 함께 분노하는 모습. 그 울분과 슬픔이 있는 거리와 천막이야말로 곧 교회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왜 연약한 우리로 교회를 세우셨나. 연약하기에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땅끝까지 증언하라.’는 말씀에서 과연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결국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누가 울고 있나 잘 살펴보자. 날마다 지옥처럼 괴롭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살펴보자. 고아와 과부, 어린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하며 품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판단하기에 앞서 품어주고, 분석하기에 앞서 사랑하고, 말을 보태기 전에 함께 울어주자. 그러다 보면 함께 즐거워할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사 어둡고 후미진 저 뒷골목을 비추게 하소서. 홀로 울고 있는 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우리로 그 사랑의 증인이 되어 삶으로 증거하게 하소서.” 세상살이 쉬운 사람 뉘 있으랴. 다만 연대하는 서로가 있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바 아버지가 있기에 다시금 희망을 노래한다.
나철수 목사 / 밀양시민교회
중세 교회의 타락이 절정에 이를 무렵 항간에서는 로마 교황청과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보며 교황청을 ROMA라고 불렀다. 이는 라틴어 “Radix Omnium Malomum Avarita”의 약어로 그 의미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로 로마의 탐욕을 풍자한 언어였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95 Theses)’을 비텐베르크성의 교회에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사실 루터는 자신이의 입으로 이 반박문을 최초로 비텐베르크성의 교회에 게시하였노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여겨졌던 이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에는 약간은 흔들리고 있다.) 종교개혁은 확실히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을 전개한 직접적인 원인은 성직자들의 탐욕, 교회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장사 행위, 특별히 면죄부의 판매는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내부만의 개혁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 말의 유럽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 과정 속에서 요구된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하는 힘의 분출이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결과도 단순히 ‘교회와 신앙’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다.
1. 종교개혁의 원인과 선구자들
교회는 이미 14세기에 발생했던 ‘교황의 바벨론 유수’, ‘교회의 대분열(2명의 교황이 존재하던 시기)’로 인해 교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성이 약화한 상태였다. 한편, 중세 봉건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적 지방분권 체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 교황의 권위는 더욱더 실추되고 국가교회주의의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1) 종교개혁 시대의 사회적 배경
봉건적 사회구조의 변화는 보편적 조직체였던 중세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잠식하게 된다.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국왕이나 몰락의 길을 걷는 봉건귀족이 다 같이 ‘돈의 궁핍’에 시달리면서 막대한 교회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부가 로마(교회)로 유출되는 것을 가로채려 하였다. (실제로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개혁과 정화를 앞세워 크고 작은 수도원을 몰수하였지만, 이런 교회 재산의 세속화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제외하고 16세기 내내 모든 유럽 국가에서 벌어지게 된다.)한편 장원제도의 붕괴로 농노 신분과 봉건적 부담에서 해방되기 시작한 농민들은 10분의 1세를 비롯한 교회세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으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개성의 각성은 중세 말의 정신적, 지적 풍토를 크게 변화시키고 교회의 획일적인 정신적 문화적 통제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 중대한 시기에 교황과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성직자의 타락은 당대인의 눈에 너무나 뚜렷하여 야유와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황 또한 르네상스의 물에 젖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의 충족에 여념이 없었다. 네포티즘(nepotism, 중세 교황이나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공공연히 자식들을 낳고 조카라고 부르는 행위)은 교황청의 상식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악랄한 권모술수의 명인인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는 대표적인 르네상스 교황인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이었다.
흥청거리는 수도원에 모여 사는 탐욕스러운 수도사들, 부재(不在) 주교, 첩을 거느린 사제와 같은 너무나 일상화된 타락상과 함께 대두된 문제는 성직자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진 것이었다. 사제는 너무나 무식해서 교인들의 신앙과 삶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었다. 수도사들은 청빈한 생활로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건달처럼 사람들을 등쳐먹고 살았다. 주교들은 자기가 관할하는 교구 안에 있는 교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감독자가 아니라 정치 모리배요 장사꾼이었다. 예외적으로 신실한 수도사,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현실은 가문의 힘으로 12살의 소년이 교황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9세는 세 번에 걸쳐 교황이 되었는데 그가 가문의 힘으로 첫 번째 교황이 되었을 때 나이는 12-14세였다.
이제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2) 선구자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이런 사회 상황의 변혁과 맞물려 12세기 프랑스의 발도, 14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위클리프와 그 계승자인 롤라드파, 그리고 15세기 전반에 보헤미아에서 발생한 후스파의 움직임, ‘공동생활 형제단’등은 명백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 교권의 분열: 교황의 아비뇽유수(1309-1377,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가 아비뇽의 교황 재위기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에 비교함으로 유래), 대분열 시대(1378-1415, 이 기간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였으며, 1409년에는 피사 종교회의에서 제3의 교황을 선출했으나 두 교황이 수용하지 않음으로 결국 3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혼란은 1417년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 종결되었다)
2-1) 피에르 발도(Pierre Waldo, 1140-1217): 프랑스 남부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도(왈도)는 사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삶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1160년경 성경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몰래 사비를 들여 복음서와 시편을 로망어로 번역해 읽고는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비유를 읽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아내와 딸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만 물려준 후, 나머지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는 탁발로 복음을 전하며 다녔다. 잘 알려진 프란체스코(1182-1226)는 바로 발도의 삶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176/7년 경, 빈민을 위한 무료 급식회를 조직하였고 동료 순회 설교자들과 함께 지속적인 성경 번역을 추구함으로 로마와의 갈등(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예로니모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역만을 성경으로 사용하게 했지만, 이를 거역한 것, 불가타(Vulgata)sms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인 자신들만이 설교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이 역시 침해)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1182/83년경 교황 루시우스 3세는 Verona 공의회에서 발도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였으며 리옹에서 쫓아냈지만, 발도는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발도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며,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의 성사를 부인했다.
이기정 목사 / 대동교회
섬에 산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마을에 사시는 한 분이 도선을 기다리면서 “섬에 살면 불편한 것도 많지만…. 섬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섬 생활은 조금 불편할 뿐, 행복은 매일입니다. 미래는 도시보다 섬이 더 주목을 받을 것입니다.
여자도는 철부선(자동차를 싣고 다니는 배)이 다니지 않고, 도선(사람만 타고 다니는 배)이 다닙니다. 생활의 모든 것은 도선으로 운반합니다.
가장 운반하기 힘든 건축자재도 도선으로 실어 날라야 합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에게 배에 오르고 내리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도 섬에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잠깐의 불편보다 섬에서 산다는 행복이 더 크기 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나에게 섬은 사명의 땅입니다. 사명이 있기에 불편이 되지 않고, 외딴섬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섬입니다.
섬에서 한 번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창조의 날이요, 더불어 살아가는 날입니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섬에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령 전도사 / 지구촌선교교회
올해 11월, 일본 시즈오카시에서 치유 집회가 있었다.
치유 집회를 진행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으로, 젊은 청년들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 선교 훈련학교 학생들이 찬양, 반주, PPT 사역 등을 도왔고, 나도 그때 함께했다.
치유 집회는 이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돕는 일로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었다. 사실, 일본에서 치유사역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 사람을 떠올리면 조용하고 친절하지만, 속내를 알기 어렵고, 주변에 피해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본 교회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서 열정적인 신앙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큰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손뼉을 치고 소리 내어 찬양하거나 통성기도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심지어 교회 십자가도 교회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일본 선교를 하셨던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일찍 16세기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겪으면서 약 30만 명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종교는 목숨을 내놓고 믿어야 하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이 깊어졌고, 그래서인지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은 매우 소극적이다. 전도도 쉽지 않고, 치유나 기적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의 뜨거운 예배와는 다른 분위기를 예상하며 치유 집회에 대한 기대는 적었다.
집회는 찬양으로 시작해서 말씀 선포와 치유사 역이 이어졌다.
약 2일간 진행되는 치유 집회의 첫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았지만, 참석한 사람 중 일부는 허리나 다리 등 치유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으로 시간이 길어지자, 일부는 치유를 기다리지 못하고 떠났고, 고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조금 있었다. 그중에는 귀신이 들려 일본말로 “시끄러워! 시끄러워!”하고 소리치는 여성도 있었다. 나는 인도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 모습이 특별히 신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첫날은 예상한 대로 차분하게 지나갔다.
둘째 날, 찬양으로 치유 집회를 시작하려던 중, 한 남자가 집회 장소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여러 계단을 내려와야만 맨 앞자리 근처에 앉을 수 있었고, 그의 다리는 분명 많이 불편해 보였다. 한 여성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자리에 앉은 그 남자 옆에는 휠체어가 있었다.
누가 봐도 스스로 걷고 싶어 집회를 찾아온 그 남자를 보고, 나는 왜인지 긴장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집회에서 PPT와 영상을 맡았기 때문에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남자의 바로 앞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일본에서 예수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죠? 이 자존심 센 성인 남자가 어렵게 왔습니다. 꼭 고쳐 주셔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진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발 그의 다리를 고쳐주세요.”
영접기도 시간이 되었을 때, 그 남자도 손을 들고 앞에 나가 기도하고 싶어 했지만, 영접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까지 걸어갈 수 없어 자리에 앉은 채 손을 들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간절하게 보였다.
치유사역이 시작되었고, 그 남자는 자신의 차례가 언제쯤 올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함께 긴장되었다. 내 마음속에서 “너 하나님이 안 고쳐주실까 봐 긴장되니? 무조건 고쳐주실 거야!” 하며 얼마나 마음을 잡았는지 모른다.
마침내 그 남자의 차례가 왔다. 거기 모인 약 100명 정도의 사람들도 그를 주목했다. 내 머릿속에는 “혹시 안 고쳐져서 낙심하면 어쩌지?”하는 만약의 아찔한 상황도 스쳐 지나갔다.
그는 15년 전 뇌졸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고, 그 이후로는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순 있지만 스스로 걷거나 뛸 수는 없다고 했다. 치유사역을 맡은 선교사님이 그 남자의 다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마친 후 “일어나세요!”라고 외쳤다.
그 순간, 그 남자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 그는 스스로 걷고 뛰며, 자기가 가져온 휠체어를 밀고 다니기까지 했다. 너무 뛰어서 무릎이 아프다고도 했다.
집회 곳곳에서 박수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하나님께 감사가 먼저였지만, 벌떡 일어나준 그 남자에게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5
그 남자를 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의심이 들었을까. 성경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일은 큰일도 아닐 정도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가. 내가 믿음의 능력을 의심한 것은 아닌가? 지금 나의 모습이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모습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종종 치유사역을 이단으로 간주하거나, 병을 기도로 고침받는 것이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처럼 대할 때가 있다. 방언 또한 어떤 교단에서는 인정하고, 어떤 교단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선 침례를 세례로 표현하는가 하면(예수님도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받으셨다.) 침례라는 단어를 쓰면 침례 교단 소리를 먼저 듣는다.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나도 모르게 물들고 있진 않은가? 크리스천에게 성경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과학인가? 교단인가? 세상의 지혜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6:17-18
만약 우리가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게 준 능력으로 얼마나 전도했니?”라고, 물으실 때 “아뇨, 그게 저는 능력이 없던데요…” 라고 대답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무책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겐 기적이 우리에겐 일상이 되어야 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1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모든 순간, 우리는 세상을 믿을지 하나님을 믿을지 예민하게 선택해야 한다.
오늘부터 만약 몸에 아픔이 있다면, 스스로 머리에 손을 올려 기도해 보자.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 말대로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서로 돕고 전도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삶을 보고, 정말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오늘 우리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도 이제는 세상에 휘둘려 흔들리지 않고 모든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기대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