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바다에는 훌륭한 뱃사공이 나오지 않는다. 폭풍과 격랑이 심한 험난한 바다에서 유능한 뱃사공이 만들어진다. 온 실에서 자라나는 화초는 생명력이 약하지만, 광야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자라나 는 화초는 생명력이 강하다. 추위에도 떨어본 사람만이 태양의 따뜻함을 절감한다, 그런가 하면 눈물의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 냉대와 박 해를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과 친절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 서,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진다. 정신력과 의지력이 강화되고 양심과 인격이 강화되고 체력 또한 강화된다. 그래서 게으름과 나태는 천재를 둔재로 만들고 인간 을 나약하게 게으르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하루가 바쁘다. 매일 시간이 부족하다 놀고먹으면 팔자가 좋은가, 내 나이 80이다 살아온 과거를 뒤돌아보면 언제나 항상 바쁘게 일해왔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젊다. 생각도 마음도 건 강하고 눈도 건강하다. 밤낮 굴려야 한다. 코도 가만히 붙어 있어도 열심히 숨을 쉰 다. 귀도 여전히 듣는 일에 열중하고 입도 열심히 먹고 마시고 소리도 낸다. 밤이면 설교 준비하고 새벽이면 찬송과 기도로 하루가 시작된다. 문을 열면 웅장한 후지산 이 눈앞에 나타난다. 웅장하고 과묵하지만 나하고는 15년 가까이 같이 지낸다. 시원 한 눈바람을 보내주고 시원하고 차가운 후지산 물은 시원하기로는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아름다운 새소리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보다 더 아름답다. 이래서 나는 하루하 루가 즐겁고 힘이 난다. 감자 심고 상추 호박도 심고 땀을 흘리다 쉬는 시간에 수박 을 먹는 맛은 5~6십 년 전 어릴 때 먹었던 그런 맛이다. 가끔은 허리도 결리고 다리 도 흔들릴 때가 있지만 빌딩 숲이 우거진 동경이나 도심에선 결코 맛볼 수 없을 것 이다. 성경에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을 했고 모세는 80세에 광야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옛날 어른들께서 잠깐이야 80살 먹는 것 도 잠깐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셨는데 지금은 100세 시대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나이 먹었다고 앉아 있으면 정말 늙어 간다. 걷고 뛰고 힘쓸 때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요 젊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구슬은 닦아야 빛이 나고 연장도 자주 써야 녹슬지 않고 내 몸도 꾸준히 움직여야 건강해진다. 이것은 인생의 기초요 기본이요 자본이 자 생활의 주춧돌이다. 그러면서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다 병으로 밤낮 누워 있으면 진수성찬에 억만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좋은 의복이 무슨 멋을 낼 수 있을까? 몇 십 년 전의 가요 중에 이런 대중가요가 있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돌려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못다 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 데 가는 세월 막을 수도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하는 젊은 청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젊음이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 다. 그러나 애타게 찾아도 불러도 다시는 돌려받을 수도 돌아올 수도 없다. 그러나 한가지 아직도 청춘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을 소개한다.
청 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 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 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氷]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이용규 목사 / 중앙영광교회
괌에 가면 요코이상이 28년 동안 혼자 살았던 동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깊 이 2.5미터의 굴을 파서 낮에는 거기서 숨어 지내다가 밤에 나와서 들쥐, 개구리, 달 팽이와 정글의 야생 열매 등을 따 먹으면서 목숨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짐승 같은 삶을 28년간이나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때의 삶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이었다'라고 말입니다.
그가 28년간이나 정글에서 숨어서 살아만 했던 이유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에 일본군 병사로 괌에 주둔해 있었 는데, 일본군의 패배로 정글에서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낮에 나가면 적군에게 발각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에게 발견되었 을 때 그는 '아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전쟁 중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났고,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한마디 만 들었다면 28년간 짐승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인데…. 물론 전쟁이 끝났다는 소 식도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짜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어둠과 죄와 사망 권세에 붙잡혀 있던 우리를 온전히 자유 롭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는 굿 뉴스입니다. 이 좋은 뉴스를 듣지 못해서 아직도 어둠 속에 갇혀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코이상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노다상입니다. 그는 30년간이나 필리핀에서 숨어 산 사람입니다. 그는 정보 장교로서 외부의 소식을 다 듣고서도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뿐 아니라, 일본이 번영하고 올림픽도 열린 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종전(終)뉴스는 기만이고, 적대 방송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미국의 괴뢰정부이고, 일본의 진짜 정부는 만주에 망명정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전쟁 때에 필리핀의 미군 전투기가 한국을 향해 진격할 때는 일본 망명정부와 미국이 전투한 다고 믿었고, 베트남 전쟁 때에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을 향할 때는, 드디어 일본 망 명정부가 승리하여 베트남까지 진격해 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노다상은 전쟁 이 끝나고 일본이 평화 가운데,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된 것을 전혀 믿지 않았습 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정글에 갇혀서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마치 30년간이나 말입니다.
그는 종전의 기쁜 소식, 자유의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해서 불행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그렇습니다. 천국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수없이 듣지만 믿지를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복음을 못 들어서 구원을 받 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만 믿지 못해서 스스로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너무 나 많이 있습니다. 요코이상보다 오노다상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노다상은 기존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양한 지식, 정보, 교육, 경험이 있으므로 기쁜 소식(복음)은 유혹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 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과거의 정보 가 이미 그 사람의 견고한 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그에게 들어갈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30년, 아니 평생을, 스스로를 속여 어둠의 정글에 갇 혀 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믿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 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이청길 목사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30년이 넘도록 생활을 해 온 필자이지만, 살아갈수록 일 본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한일 간의 문화적 인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편견과 오해로 인해 상호 간에 불신을 낳게 되는 경우를 많 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은 오랜 선교 역사 속에서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를 투입해 왔지만, 선교실 적이 가장 부진한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선교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일본의 실상 을 알아서 할 필요가 있고, 일본인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일본선교의 성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대개 한국 사람들은 직선적이며 거칠고 결론을 서두르는 데 비해, 일본인들은 우회 적이며 예민하고 치밀하여 좀처럼 성급히 결론을 내려 하지 않는다. 일본인들 사이에 서도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덕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상식처 럼 되어있다. 그런 점이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장점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내심으로는 격분하더라도, 겉으로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을 추진하는 듯한 모습 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인들은 어느 모임에서든지 서로 격렬하게 분쟁하거나 논쟁하는 등의 추한 모습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대개, 반대 의견도 충분히 들은 후에 자신의 의견을 다시 분석하여 별도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 의견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반박하거나 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본심을 제대로 알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예의상 겉치레로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일을 해나가 가려고 할 때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본인들은 되도록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무리 자기가 싫더라도 그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 려고 애쓰는 이유에서이다. 그렇게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서로가 마음이 편하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개 겉으로는 ‘yes’이지만 마음속으로는 ‘no’의 경우가 많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이, 일본인들의 본심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말 한다. 또한, 일본인들끼리도 서로 다데마에(원칙)와 혼네(본심)를 바로 구별하기가 어 렵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들이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 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인들과 사귀면서 “한번 놀러 오세요” 한다고 해서 그냥 찾아가는 것 은 실례가 된다. “놀러 오세요”라고 말할 때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말해주면 본심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겉치레 인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본인들을 만나서 “교회에 한 번 오세요”라고 말하면, 대개는 가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일을 겪게 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일본인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싫어하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쉽게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상호 간에 마음이 편하고 귀찮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을 방문하거나 병문안할 때도 무리한 선물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과일 몇 개, 꽃 몇 송이 정도로 인사를 하는 게 보통이다. 그것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 뜨거 울 정도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배려라고 생각하며, 또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실례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 라서 한국인들의 지나친 친절에 일본인들은 오히려 부담을 가질 수 있고, 나아가 역효 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윤근 목사 / 서울지구촌교회
이사야서 40장 28절에서 3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이 말 씀의 제목은
”하나님을 앙망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여 비상하라”입니다. 주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주님께 두고, 주 님을 우러러보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게 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며 날마다 새 힘을 주시고 있다는 약속을 발견합니다.
비상(飛上)이란, '날 비(飛)'와 '위 상(上)'의 합성어로, 날아서 올라간다는 의미입니 다. 주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품 안에서 두려움 없이 비상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주 품에" 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거친 파도가 우리를 향해 달려와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날아오 를 수 있습니다.
주를 앙망하는 자는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저앉아 있어도,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습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해집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 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마지막 날에 영광으로 나타나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시편 147편 4절에 보면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 도다” 하나님께서는 별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별을 세시고 그 별들의 이 름을 모두 부르시고, 그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통치하십니다. 천 문학자들도 셀 수 없는 별들을 하나님은 다 세시고 이름을 붙이십니다. 우리 지구상 인 류의 인구수가 80억을 넘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모든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 신바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 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8절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 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 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함이 없으시며, 그분의 명철은 끝이 없습니다. 우 리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간 것 같을 것이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 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기억합시다. 크리스천은 가슴에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임을 기억하고, 항상 기 뻐하며 힘이 넘쳐서 찬송하며 감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 도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피곤하지 않고 늘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앙망하며 비상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항상 꿈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꿈을 크게 가져야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 습니다. 대통령이 될 꿈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대통 령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갖은 사람은 사소한 일에 시험 들거나 얽매이질 않습니다. 왜 냐하면, 대통령이 될 사람은 큰 꿈을 갖고 있으므로 스스로가 대통령답게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사소한 일에 낙담하고 의기소침하여 힘없이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 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노인일지라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 날개침 같이 새 힘을 얻고 비상합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갈렙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유다 지파를 향한 꿈을 갖고 있었기에 아직 개간도 되지 않은 땅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슴에 품은 지 40년이 지 났지만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강건함이 변함이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비전을 향한 설렘과 감격이 그의 삶을 충만하게 인도하고 있 습니다. 크리스천은 꿈과 설렘으로 가득 찬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 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생명과 자유가 최고의 축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음껏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며 비상하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 다.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어떤 장애물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비 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 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꿈을 크게 가지십시오.
둘째로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하십시오. 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 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우리가 꿈을 크게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전쟁에서 승리할 전략을 주십니다.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견고하고 굳게 닫혀있는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 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십니다. 전쟁에 능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철과 지혜로 세상의 무기인 대포 같은 것을 사용 하지 않고서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얼마나 신이 납니까? 통쾌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하셨습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주저앉지 않습니 다. 주님을 신뢰하므로 담대히 나아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승리합니다.
마지막으로 날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3절 말씀처럼 위의 것을 생각하십시 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 비상할 수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염려와 근심에 싸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만 위로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날아가는 거위 (Flying Geese)” 이야기를 아십니까 거위는 날개가 있습니 다. 그런데도 땅만 보고 사는 거위들은 날개를 갖고 있어도 매일 뒤뚱뒤뚱 걸어 다닙니 다. 엄마를 쳐다봐도 뒤뚱뒤뚱 아빠를 쳐다봐도 뒤뚱뒤뚱 옆집 아저씨도 뒤뚱뒤뚱 그 가 보는 것은 온통 땅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이 거위가 깨닫습니다. ‘나에게 날개 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나의 몸에 날개가 있을까? 날개가 있다는 것은 날 수 있 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결국 날게 됩니다. 우리 도 소망의 날개를 가졌음을 깨닫고 하늘 위를 바라보며 날아올라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을 상상합시다. 주님과 함 께 비상하며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시다. 땅의 것에 머물지 않고, 위의 것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비상합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