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다리가 없는 40대 중년 남성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넜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저는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에서 읽고 감동을 크게 받고 이 글을 씁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하지만 가슴은 온통 감동으로 아직도 뛰고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동영상까지 찾아서 보았다고 하네요.
배영과 접영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잘린 팔과 다리로 헤엄쳐 나가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고 하네요. 누구나 그랬을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은 필립 크루아종 프랑스 중서부 도시 생래미쉬르코로즈주에 사는 사람으로 1994년 텔레비전 안테나를 고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그만 2만 볼트 전기에 감전돼 팔과 다리가 모두 절단되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사고를 당한 지 16년째 되던 2010년 9월18일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전 8시께 영국 남부 포크스턴 해안에서 출발하여 약 13시간을 헤엄치는 악전고투 끝에 밤 9시쯤 프랑스 북부 칼레 해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잘린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불행한 사고로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도전했습니다. 춥고 어깨와 배가 아팠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오리발 모양의 의족을 다리에 달고 헤엄쳤지만 팔에는 의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어깨에서 팔꿈치 부분까지 남은 팔로 헤엄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상보다 10시간이나 더 빨리 해협을 헤엄쳐 건넜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34킬로미터나 되는 이 구간을 헤엄쳐 건넌 것은 이분이 처음이라 합니다.
도버 해협은 물이 차고 물살이 거세 수영 실력인 뛰어난 사람도 맨몸으로 횡단하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하니 더욱 놀랍기만 하네요.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헤엄치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1주일에 30시간씩 2년을 그렇게 훈련을 해왔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전동 휠체어에 앉아서 지내야 할 사람이 그런 도전에 준비하자 무모한 도전이라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분명 무모한 도전인 것은 맞습니다. 인간은 바다에서 수영할 때 느끼는 두려움은 아주 크다고 합니다.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바다에서는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답니다.
그리고 그때 도버 해협의 수온이 15도 안팎이었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저체온증에 빠지고 호흡 불능에 근육마비까지 와서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시속 5킬로미터로 헤엄치는 일반 선수들보다 못하지만 3킬로미터로 헤엄쳐 나갔답니다.
더구나 헤엄치는 동안 음식물 칼로리 보충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넜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일입니까
수영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잘린 팔과 다리로 추진력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고 나기 전 수영을 전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두 무릎에 매단 오리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고 윗부분만 남은 두 팔로 몸의 균형을 잡으며 물살을 갈라 수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수영 전문가들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가능한 일로 전환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흔히 그 일을 바다를 건너는 달팽이에 비유합니다.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넌 필립 크로아종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곧 그 말은 수정되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지 못한 달팽이가 아니라 바다를 건너간 달팽이기 때문입니다. 달팽이도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달팽이는 평생 한자리에 붙어있는 조개와는 달리 느리지만 움직이며 기어다니는 존재입니다.
근육을 이용해서 몸을 움직이지요. 이때 몸에서 분비되는 점액 덕분에 상처를 입지 않고 미끄러지듯이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팽이는 움직이는 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운명은 노력하고 인내하는 자에게는 절대 배반하지 않습니다. 저도 80살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참고 견디어내는 인내심이 있었던 것 같네요. 우리 인간은 삶의 속도가 느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조개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날이 갈수록 멈추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래도 달팽이처럼 조금씩이라도 내일을 향해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필립 크루아종과 같이 푸른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 정호승 산문집에서 -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는군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2-3) 존 후스(John Huss, 1369-1415.7, 얀 후스 Jan Hus): 얀 후스는 1369년에 보헤미아(체코)의 후시넥(Husinec) 지방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스는 심오한 대학 교육 과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1396년에 프라하에서 교수 시험에 합격했고, 1402년에는 프라하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원래 그는 다른 개혁가들이 그랬듯이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항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신앙을 회복하고 성직자들의 경건한 삶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탁월한 설교가였던 그의 설교로 인해 영향력이 커지자, 프라하의 주교가 교황청에 보고하여 그의 설교를 소속 교구의 교회와 수도원으로 제한하였다.
이에 불복종하여 계속해서 설교하자 1410년에 로마에 소환 명령을 받았고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 다음 해 파문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보헤미아의 국왕 이하 온 국민이 그를 따르는 상황이어서 그의 사역은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교황을 포함한 모든 신자를 심판할 수 있으며,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에는 복종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다’는 그의 사상은 위클리프에게서 온 것이었고 그는 스스로를 위클리프의 제자라고 공언하였다. 로마 교황 존 23세가 다른 교황과 싸우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지자 면죄부를 판매해 충당하려 하자 후스는 면죄부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한다고 대항하였고 교황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기독교인 간의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은 불신앙적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1414년 당시 여러 교황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리자, 후스가 소환되었다. 보헤미아의 황제는 후스에게 신변 보장을 약속하며 회의 석상에서 그의 입장을 변호하라고 하였다. 후스는 교회의 개혁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기 위해 콘스탄스로 향했다. 하지만 후스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이 열렸다. 그의 신변 보장을 약속했던 황제는 이단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쇠사슬에 묶여 회의 석상에 나타난 후스는 이단사상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을 배반할 수 없었고 “나는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유일한 심판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한다. 그리고 그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1415년 7월 후스는 자신의 저서들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가 기둥에 묶였을 때, 마지막으로 살아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주 예수여, 당신만을 위해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불평 없이 받아들입니다. 부디 나의 원수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불길 속에서 그는 시편을 낭송하였다.
후스는 보헤미아에서 학문적으로나 종교 사상 면에서 두드러진 인물일 뿐만 아니라, 독일의 루터와같이 민족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저서는 체코어로 쓰였으며 이를 통해서 슬라브 지방의 언어 발달에 개척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호스 처형의 소식이 프라하에 전해지자 격렬한 분노를 자아내었다. 보헤미아인들은 보헤미아를 이단의 나라로 보는 행위라고 비난하였고, 이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민족적 모욕으로 느꼈다. 프라하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민들은 아이런(Iron) 주교관을 공격하였고, 의회가 소집되어 공의회에 보낼 분노의 서한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후스의 진정한 신앙심을 비호하면서, 공의회의 금기에 저항하는 선서를 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69명의 가족이 서명하였으나 곧 452명으로 늘어났다. 이를 제지하는 가톨릭 교단이 곧 조직되었지만, 프라하 교회의 대부분은 후스 파의 손에 장악되었다. 1419년부터 1436년까지 후스전쟁의 결과로 보헤미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화약(和約)을 맺고 보헤미아 국민교회가 생겨난다.
* 프라하 4개 조항: 1419년 지기문트(Sigismunt)가 황제가 되고 후스파의 분노가 치솟자, 황제는 교황과 연합하여 후스파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계획했다. 1420년에 프라하 시민들이 사악한 영혼을 숭배한다는 소문 하에 유럽 각국에서 보헤미아로 떠나는 십자군들이 프라하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급진적 후스파인 타보리트(Taborite) 지도자들은 단합하였고 프라하 시민인지즈카(Zizka)의 지휘하에 십자군(왕실 군대)을 물리쳐 버렸다. 비세라드(Vyeshrad) 전투는 후스파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고, 그 결과, 유명한 ‘프라하 4개 조항’이 선포되었으며, 이것이 후스파의 진정한 헌장 역할을 하였다.
1) 설교의 자유
2) 모든 기독교인에게 직접 행하는 성찬
3) 사제와 수도사 등 성직자들의 세속적인 재산을 몰수하고 세속적인 권력 없이 모범 적인 삶을 살 것
4)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데 기독교가 힘을 가질 것
모라비아형제단(Moravian Brethren, 공동생활兄弟團): 후스의 추종자들 한 분파로 보헤미아 국민교회에 흡수되지 않은 후스파가 후스가 죽은 지 50년 뒤에 보헤미아 동부 모라비아의 쿤발트(Kunvald)에서 종교 집단을 형성한 것이 오늘날 모라비아교회의 기원이다. 이들은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사도시대(使徒時代)의 소박한 신앙과 수도 생활을 추구했다. 군 복무와 도시 생활을 거부한 채 사제 독신 제도를 지켰다. 또 종교개혁의 불씨를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칼뱅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 훨씬 이전의 프로테스탄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16세기 중반까지는 체코 지역 주민의 90%가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청소년 교육에 힘쓰면서(독일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모라비아 형제단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01년 최초의 신약 찬송가집을 냈고 1593년에는 최초의 체코어 성서도 출간하였다.
가톨릭의 반(反)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17세기 중엽 30년 전쟁 때는 보헤미아에서 탄압을 피해 헤른후트 지방으로 피난 온 모라비안 형제단 단원들이 경건주의를 숭배하는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Nikolas Ludwig Zinzendorf)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이들에게 감화를 받고 신앙 운동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다음 호에 계속


마츠자와, 카사이, 타카마츠씨의 남자 성도 3명이 그동안 성경 공부와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을 고백하는 단계로 성장하였고, 교회에 본이 되는 봉사 및 전도 생활에도 남다른 성의를 보여왔다. 이 세 명의 성도는 앞으로도 주님을 위해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세례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