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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호, 2025년 4월호
한터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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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31 05:04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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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형 목사 / 발행인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왔단다.”      
  암울하고 가난했던 1960년대. 송대관의 이 노래는 우리나라 전 국민들에게 큰 소망과 힘을 주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작 은 꿈이나마 이루고자 구로 공단에서 합숙하며 공장 생활했던 공원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절망 가운데 소망이요.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비춰왔다. 꿈이라는 말에는 큰 소망이 들어 있어서 약자도 강해질 수 있는 소망. 가난한 자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꿈 처녀와 총각이 돈 모아서 시집·장가갈수 있는 꿈. 어두운 창고 안에서 매일 매일 일하며 모은 돈으로 꿈을 생각할 때마다 힘이 솟아났을 것이다.      
  이 노래가 주었던 기쁨과 소망은 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대학 교수님은 훌륭하시고 책도 많이 쓰셨는데 누구나 이 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분이신데 그분은 젊은 학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면서도 언제나 지혜를 강조하셨는데 성실하라,      
  정직하라, 생각하라 그리고 꿈을 가지라고 강조하셨는데 하나님도 우리에게 꿈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꿈을 가져라. 했고 야곱의 12 아들 중에 11번째 요셉은 꿈을 말하고 꿈대로 되었는데 귀한 자리에서 노예로 팔려 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억울하게 감옥생활까지 했으나 그는 한 번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잘 적응하고 견디어서 결국 애굽이란 큰 나라의 총리가 되었는데 결 국 꿈대로 부모 형제들이 모두 요셉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애굽 온 나라가 노예로 팔려 온 요셉에게 엎드려야 했고 임금도 인장 반지에다 목걸이 임금만 타는 수레까지 몽땅 요셉에게 넘겨주었다꿈꾸었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건 아닌 듯싶다. 요셉이 출세하여 총리가 되기까지는 참고 견디기 어려운 누명과 억울함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며 힘들었을까. 남모르게 아픔과 고통의 눈물도 흘렸으리라. 그러나 출세하고 꿈이 이루어 지기까지는 모래알이 진주가 되듯이 고통과 아픔의 과정을 참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돈키호테의 글이 생각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 의 별을 잡자. 이길 수 없어도 적과는 싸워야 하는 현실의 돈키호테의 삶을 얘기 해준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꿈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인생을 얘기한 것이다.      
때로는 세상과 환경과도 싸워야 하지만 나 자신과도 싸워야 하는 때도 있다. 우리가 피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이 현실 앞에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왔단다 하고 기분 좋은 희망의 소식들이 왔으면 좋겠다. 크고 작은 꿈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꿈이라면 루터 킹 목사를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인의 자녀들과 노예의 자식들이 함께 손을 잡고 뛰어놀며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입니다.”      
  꿈이라면 너무나도 진지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했었는데 백인이 타면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 없이 비켜줘야 했던 시대였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다. 같은 사람인데 색깔에 따라서 인간 이하의 차별을 받아야 하니 분명히 공공장소에서도 달랐을 것이다.      
  영국의 새뮤얼 존슨은 인생은 고난과의 싸움이다.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너와 내가 싸우고 흑과 백이 싸우고 가난과 질병과 싸우고 좌-우가 싸우고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가 싸운다.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나섰다. 하나님은 사랑을 만드셨지. 흑백을 만들지 않으셨다. 검고 약한 자기 종족의 인권을 위해서 싸우며 수 없는 협박과 위협을 받으며 외치고 싸우고 또 싸웠다.      
  1968. 4. 4. 39세의 젊은 나이에 머리에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학자요 사회 운동가요 민권 운동가였으며 목사였다. 사람이 피 부색으로 평가받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는 인간 평등 사회를 진정으로 원했을 것이다.      
  미국 연방 정부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공휴일로 지정했다.      
  오직 세상의 어두움을 빛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대항했던 꿈의 사람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철수 목사 / 밀양시민교회

 

  종교개혁(宗敎改革)     
  중세 교회의 타락이 절정에 이를 무렵 항간에서는 로마 교황청과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보며 교황청을 ROMA라고 불렀다. 이는 라틴어 “Radix Omnium Malomum Avarita”의 약어로 그 의미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로 로마의 탐욕을 풍자한 언어였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 조 반박문(95 Theses)’을 비텐 베르크 성의 교회에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사실 루터는 자신의 입으로 이 반박문을 최초로 비텐베르크성의 교회에 게시하였노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사실이라고 여겨졌던 이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에는 약간은 흔들리고 있다) 종교개혁은 확실히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을 전개한 직접적인 원인은 성직자들의 탐욕, 교회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장사 행위, 특별히 면죄부의 판매는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내부만의 개혁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 말의 유럽 사회의 전면적인변화 과정 속에서 요구된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하는 힘의 분출이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결과도 단순히 ‘교회와 신앙’의 변화에만 국한되지않고 전 유럽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다.


  1. 종교개혁의 원인과 선구자들     
  교회는 이미 14세기에 발생했던 ‘교황의 바벨론 유수’, ‘교회의 대분열(2명의 교황이 존재하던 시기)’로 인해 교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성이 약화한 상태였다. 한편, 중세 봉건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적 지방분권 체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 교황의 권위는 더욱더 실추되고 국가교회주의의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1) 종교개혁 시대의 사회적 배경     
  봉건적 사회구조의 변화는 보편적 조직체였던 중세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잠식하게 된다.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국왕이나 몰락의 길을 걷는 봉건귀족이 다 같이 ‘돈의 궁핍’에 시달리면서 막대한 교회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부가 로마(교회)로 유출되는 것을 가로채려 하였다. (실제로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개혁과 정화를 앞세워 크고 작은 수도원을 몰수하였지만, 이런 교회 재산의 세속화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제외하고 16세기 내내 모든 유럽 국가에서 벌어지게 된다)한편 장원제도의 붕괴로 농노 신분과 봉건적 부담에서 해방되기 시작한 농민들은 10분의 1세를 비롯한 교회세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으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개성의 각성은 중세 말의 정신적, 지적 풍토를 크게 변화     
시키고 교회의 획일적인 정신적 문화적 통제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 중대한 시기에 교황과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성직자의 타락은 당대인의 눈에 너무나 뚜렷하여 야유와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황 또한 르네상스의 물에 젖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의 충족에 여념이 없었다. 네포티즘(nepotism, 중세 교황이나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공공연히 자식들을 낳고 조카라고 부르는 행위)은 교황청의 상식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악랄한 권모술수의 명인인 체자레 보르지(CesareBorgia)는 대표적인 르네상스 교황인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이었다.     
  흥청거리는 수도원에 모여 사는 탐욕스러운 수도사들, 부재(不在) 주교, 첩을 거느린 사제와 같은 너무나 일상화된 타락상과 함께 대두된 문제는 성직자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진 것이었다. 사제는 너무나 무식해서 교인들의 신앙과 삶을 제대로 인도할 수 없었다. 수도사들은 청빈한 생활로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건달처럼 사람들을 등쳐먹고 살았다. 주교들은 자기가 관할하는 교구 안에 있는 교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감독자가 아니라 정치 모리배요 장사꾼이었다. 예외적으로 신실한 수도사,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현실은 가문의 힘으로 12살의 소년이 교황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9세는 세 번에 걸쳐 교황이 되었는데 그가 가문의 힘으로 첫 번째 교황이 되었을 때 나이는 12~14세였다.     
  이제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2) 선구자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이런 사회 상황의 변혁과 맞물려 12세기 프랑스의 발도, 14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위클리프와 그 계승자인 롤라드파, 그리고 15세기 전반에 보헤미아에서 발생한 후스파의 움직임, ‘공동생활 형제단’ 등은 명백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 교권의 분열: 교황의 아비뇽유수(1309-1377,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가 아비뇽의 교황 재위기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에 비교함으로 유래), 대분열 시대(1378-1415, 이 기간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였으며, 1409년에는 피사 종교회의에서 제3의 교황을 선출했으나 두 교황이 수용하지 않음으로 결국 3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혼란은 1417년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 종결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해인 시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이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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