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부터 70여 년 전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10리 정도 거리를 책을 보자기에 싸서 다녔는데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닐
때는 힘이든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립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필요하던 시대에 노트와 연필을 자유롭게 사용하질 못했다. 우리
동네에 참고서를 가진 친구는 이름이 곽무영이었다. 곱상하게 생겼고 피부도 하얗게 타고나서 귀공자같이 생겼는데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인데 밤이면 초롱불을 들고 그 집에 가서 숙제를 같이하곤 했었다.
못 만난 지 수십 년이 흐른 후인 지금부터 15년 전쯤에 그 친구를 만나러 부산 동래로 갔다. 세월이 수십 년이 지나서인지 서로가 못 알아
보고 한번은 지나치고 두 번째 알아보고 만났는데 그는 개인택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가난했던 나는 그 친구가 항상 부러웠었다. 지금쯤은 어디서 대궐 같은 집에서 잘 살고 있겠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
은 착각이었다.
지금은 연필, 노트, 책을 쌓아놓고 사용한다. 그 시절과 달리 마음껏 사용한다.
할머니가 달걀을 모아서 오일장에 가서 팔면 신발이랑 노트, 연필을 사주셨었는데 나는 연필 샀다, 신발 샀다고 자랑하고 싶어 그날을 언
제나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 시절 어머니는 항상 대장부는 마음이 넓고 커야 한다며 마음공부를 강조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그러려니 하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지금 내 주변을 돌아보니 세상을 떠나간 친구들도 많고 잘못 살아서 힘들게 고생하다 멀어진 친구들도 더러 있다.
이래저래 80살이 되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세상을 살다 보니 정작 해야 할 마음공부는 생각도 못 했다.
중동에서 2년 기름을 짜고 삼청교육대 정화 운동 전두환 군부 시절엔 김포세관을 거쳐 강서 경찰서에 갇혀 고척동까지 넘어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도 나는 억울하다, 나는 무죄라는 등 밥만 먹고 하는 얘기다. 다 그런 얘기들뿐이었다. 그런 그곳에 어느 날 선
교단체에서 목사님과 대학생들이 위문 전도하러 왔다. 빵과 음료수와 전도치를 잔뜩 가지고 왔는데 설교 말씀을 안 들으려고 귀를 막고 고함
치며 거역했음에도 나는 그때 예수를 만나고 말았다. 가슴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부인할 수도, 감출 수도 없었다. 그 이후 세월이 지나 신학
을 공부하면서 기도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삼각산, 문학산, 백마산 등의 산 기도와 오산리 금식기도원 부흥회를 쉴 새 없이 다니면서 회개하
게 되고 그때마다 주님을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마음공부를 깨닫게 되었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게 된 것이다. 비
단 나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정치는 나라를 생각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가지게 되면
보고 들은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정치꾼들이다.
나는 그들의 손부터 본다. 혹시나 오리발을 들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에게 진실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다. 뇌물과 청탁을 받고도 항상 오
리발을 내미는 철면피들인 것이다. 항상 대가성 없는 돈이라고 우겨대며 결백하다고 항변한다.
보고 있자면 기가 차다 못해 가슴이 콱 막혀버린다. 국회는 거짓말 공장이며 입법, 사법, 행정 등 온 나라가 썩어서 진동한다, 새빨갛게 물
들었다.
신용불량자 문제가 아니다, 양심 불량자가 더 많다. 썩어서 냄새나는 고기는 개도 안 먹는다. 교회 다니게 되면서 마음 고생하며 살아온 나
자신을 바라보니 이전엔 마음도 썩고 양심도 마비되어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이 시작되면서 호주머니가 깨끗해
지고 입이 깨끗해지면서 양심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죄인이요 괴수였다. 성경은 나에게 주신 말씀이요 나를 깨닫게 하고 회개
하게 하고 때론 때리고 싸매도 주며 고치고 새로 만들어 주었다.
어린나무의 상처 글자는 나무가 크면 같이 커진다. 사람도 유년 시절 상처나 충격이 처음엔 잘 모르는데, 마음에 잠복하여 있으면서 성장
하게 된다.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감옥에 수감되어서 성경을 가지고 면회를 하러 갔는데 그 아들이 엄마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았다고 한다. 그는
절도범으로 들어왔는데 어릴 때 시골에서 이것저것 모두 내 것처럼 먹고 흉허물없이 지냈던 것이 커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해 감옥까지 오
게 된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옛말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랑한다면 매로 때려서 키우라고 했다. 세상에는 천한 것도 많
이만 귀한 것도 많다. 사람에겐 무엇이 귀하고 중요할까?
하나님은 인간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 인생의 삶과 장래의 길을 이끌어 간
다.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라도 깨끗하지 않고 시궁창처럼 더럽고 지저분한 쓰레기장 같으며 가치가 없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이라
고 했으니, 마음을 귀하게 여겨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면 보는 것이 다 불편하고 마음이 편하면 세상 하는 일이 모두 편안하다.
월남의 호치민은 죽고 나니까 입던 옷과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한 켤레뿐이었다. 평소에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
니며 전쟁 중에도 정독했다고 한다.
누가 집을 주었는데 불편하다고 창고에서 잠자고 월남이고 월맹이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온 국민이 환영했고 그는 정적을 만든 적
이 없었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3가지를 실천하며 살았는데 1.함께 일하고 2.함께 먹고 3.함께 산다는 것이었다.
월남에는 호치민시가 있고 호치민거리가 있고 죽은 후에는 국민들의 마음이 있다.
서울의 큰 교회의 한 집사님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중동에 돈 벌러 나가고 자신은 새벽기도를 매일 하면서 이리저리 빚을 갚으며 살
던 중에 간이 안 좋게 되어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는데 병원 갈 형편도 안 되고 해서 아버지 고쳐주시라며 매일 기도 중에 어느 날 꿈에 여
자 셋이서 양배추에 실파를 얹어 먹으며 얘기하는데 이거 간에 아주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꿈에서 깼는데 나에게 주신 처방이구나 하면서
그것을 6개월 정도 먹었는데 하루는 새벽부터 계속 화장실을 드나들었는데 남산만 한 배가 평지처럼 꺼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다.
우리 몸이 이렇게 부패하니까 더러운 오물을 쏟아냈는데 우리 마음은 오죽하겠나
시기, 질투, 음란, 거짓 등 이런 마음을 버리기만 하면 마음이 청결케 되어 하나님을 본다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마음을 채우는 일도
힘이 들지만 비우는 일은 더 힘이 든다.
위장도 비우면 건강에 좋고 마음을 비우면 건강뿐 아니라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도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 건강이 없
는 인생은 헛것이요. 예수 없는 신앙도 헛된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마음이 더럽고 양심이 불량한 자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으니 더는 두고 볼 일이 아니다.
나부터 마음을 비우고 마음공부에 나서보자.

2-1) 피에르 발도(Pierre Waldo, 1140-1217): 프랑스 남부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도(왈도)는 사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알
려졌지만, 그의 삶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1160년경 성경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몰래 사비를 들여 복음서와 시편을 로망어로 번
역해 읽고는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비유를 읽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
아 아내와 딸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만 물려준 후, 나머지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는 탁발로 복음을 전하며 다녔
다. 잘 알려진 프란체스코(1182-1226)는 바로 발도의 삶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176/7년 경, 빈민을 위한 무료 급식회를 조직하였고 동료 순회 설교자들과 함께 지속적인 성경 번역을 추구함으로 로마와의 갈등(카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예로니모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역만을 성경으로 사용하게 했지만, 이를 거역한 것, 불가타(Vulgata)sms 일반에게 널
리 보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로마 카톡릭의 성직자들인 자신들만이 설교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이 역시 침해)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에 1182/83년경 교황 루시우스 3세는 Verona 공의회에서 발도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였으며 리옹에서 쫓아냈지만, 발도는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발도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며,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의
성사를 부인했다.
왈도의 가르침을 받은 일단의 추종자들(발도파, waldensians)은 “리용의 빈민들”로 불리며 프랑스 남부로 퍼져나갔고 유럽 전역으로 확
산되었다. 이들은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설교하였고, 연옥, 미사, 면죄부, 성상 등을 거부하였으며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도 거부하였다.
이처럼 발도를 추종하는 이들을 발도파라 부르지만, 사실 발도가 태어나지 전부터 발도와 비슷한 신앙적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알프스
의 깊은 산속에 숨어 지내며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발도파의 신앙고백”으로 알
려진 이러한 개혁파들의 신앙고백서가 발도가 태어나기도 전인 1120년에 작성된 것을 보더라도 그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발도파는 로마 카톨릭의 타락을 비판하며 성경대로 살아가려 했지만,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등지에서 종교회의를 통한 이단
정죄뿐 아니라 마녀사냥을 통해 처형을 당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발도파는 약 98,000명 정도로 알려졌으며 그중 절반이 이탈리아에서 감
리교회와 함께 연합 교단을 이루고 있다.
16세기 루터교 신학자인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Matthis Flacius Illycicus, 1520-1575)는 발도파를 가리켜 “종교개혁 이전의
개신교도들”이라고 평가했다.
2-2)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1320-1384):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1356
년경부터 같은 대학에서 신학ᆞ철학을 강의하였다. 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청으로 나뉘어 분열되었으며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때 위클리프는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
형 교회의 두 종류로 나누어 참된 교회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이들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
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 신앙의 열매로써 짐작할 수 있다고 봄으로 교황조차도 구원이 자동으
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영적 지배와 세속적 지배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하였
으며 이 통치권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성찬에 있어서는 화체설(化體設)
을 부정하였다. 그는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라틴어로만이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고
보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성서주의와 예정론은 16세기 종교개혁기의 개신교의 교의와 일치된다.
위클리프는 1384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사후인 1414년에 열린 콘스탄스 공회의로부터 이단자라는 선고를 받고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
고 그 유해는 불태워졌다. 하지만 그의 시상은 신봉자들(롤라드파)에게 이어졌으며 또한 그의 저서는 체코의 개혁자 존 후스(John Huss)에
게 큰 감화를 주었다.
롤라드파(Lollards):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따르는 롤라드파는 ‘가난한 설교자들’이 되어 농민들에게 파고들었으며, 1381년 영국의 농민
봉기(와트 타일러의 난)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존 볼의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에 누가 귀족이었는가?”라는 말은 유명하다.
1394년 의회에 항의문을 제출하고 세속영주(世俗領主)나 주교(主敎)도 대죄(大罪)를 저지르고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으며, 성서에 근
거를 두지 않은 법률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롤라드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대영어 loller(게으름뱅이), 독일어 lollen(노래부르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
하지 않다. 1401년 ‘이단자 화형령(火刑令)’이 제정되고 탄압이 가중되었으나 롤라즈의 세력은 여전히 10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끈질긴
탄압으로 15세기 중반까지 그 세력이 급속히 쇠퇴하였으나 15세기 말에는 다시 활기를 띠어 루터파의 종교개혁운동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영국 비국교파(非國敎派)의 원류가 된다.

7일 일산 순복음 경향교회 조연화 목사 교회에서 운영하는 일본 선교를 준비하는 기도 모임과 언어교육을 하고 있는 훈련원을 방문하여
원장 이윤근 목사와 조연화목사 그리고 원생들과 예배와 일본 선교를 위한 기도회 및 식사와 다과 교제를 나누었다.
일본 선교에, 가능성을 보았고 은퇴 목사도 두 분이나 참석하였다.
금요일은 라이프호프 기독교 자살예방센터 이사장 조성돈 교수와 함께 협력 사항을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12일
에 귀국했다.


매월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각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고 식사 교제를 한다.
교회 문제 개인의 어려움 등도 서로 대화하며 교제하는 즐거운 시간이다.
이번에는 8 월 1 2~13 일 후지산 국제 기도회에 교회들도 적극 참여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합력하기로 협의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문화
행사도 기도회도 의미 있는 행사가 되리라 기대한다.

민주당이 집권도 하기 전에 국군방첩사령부를 해체 수준으로 분할하고, 검찰은 ‘공소청’으로 격하하며, 감사원은 국회가 통제하도록 바꾸
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이를‘적폐 청산 시즌2’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 실체는 명백한 피의 숙청, 권력 완전 장악을 통한 독재 체제 구축시나리오다.
이재명과 민주당은 이미 탄핵과 사법농단을 통해 권력 탈취에 대한 실전경험을 축적한 세력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단순한‘정치구상’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역시 각본대로 진행됐고, 헌재가 8:0 만장일치 로이를 인용한 그날부터, 정권 탈취의 윤곽은 선명해졌다. 다음 목표
는 분명하다.
권력기관을 모두 무력화하고, 비판 세력은 철저히 제거하며, 마지막으로 국민의 숨통을 조이는 통제사 회로의 전환이다.
군 방첩사령부 해체?
간첩을 잡고 군 내부 동향을 감시하는 최후의 보루를 해체하겠다는 건, 국가안보를 북한과 내부 간첩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겠다는 선언과
같다.
방첩 기능을 3개로 나눈다?
무력화는 물론이고, ‘기무사 정치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군 내부에서 반민주당 성향 장교들은 모조리 솎아내겠다는 뜻이다.
계엄의 불씨 제거?
이는 앞으로 어떤 국민적 저항도 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민주당 독재체제 수립에 군이 방해되지 않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검찰을 공소청으로 격하?
수사권 없는 검찰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공수처를 두 배로 늘려‘친정권 칼’오류 지하면서, 검찰은 완전히 무력화하겠다고 한다.
즉, 정권이 조종하는 칼만 남기고, 독립된 칼은 없애겠다는 독재 자식 계산이다.
감사원은 국회 아래로?
헌법상 대통령직 속기 관인 감사원을, 국회가 통제하겠다고 한다.
국회는 누구의 손에 있는가?
바로 민주당이다.
이 말은 결국 민주당이 마음대로 행정부를 감사하고 견제하며, 대통령의 손과 발을 묶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장식, 진짜 국가는 민주당이 통치하겠다는 의미다.
이재명은 말한다. “내란의 완전한 종식”
그러나 국민이 알아야 할진 실은 이것이다.
이재명이 말하는‘내란’ 이란 자신의 권력 장악을 반대하는 모든 저항을 뜻한다.
공무원노조, 군 장교, 검사, 판사, 심지어 언론까지‘내란의 씨앗’으로 낙인찍고 숙청대상이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이것은 개혁이 아니다. 완장 찬 자들의 복수극이고, 새로운 공포정치의 서막이다.
국민이여, 눈을 떠야 한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나라가 아니다.
선거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없고, 국가의 안위도 없다.
모든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살할 수 있는, 김정은식 통제 국가가 될 것이다.
6.3대 선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우리가 피 흘려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마지막 전선이다. 침묵은 공포로 이어지고, 방관은 독
재를 부른다.
이제는 국민이 나서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