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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으로 얼룩진 2천년사…신간 '중앙유럽 왕국사'
입력 2025.10.22 12:10수정 2025.10.22 12:10조회수 0댓글0

중앙유럽 전문 역사가 마틴 래디가 쓴 역사서


밀란 쿤데라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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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체코 출신 세계적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자기 소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1918~1992)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았다고 했다. 설령 소설 속 인물의 행위가 이뤄진 장소가 체코일지라도 그랬다. 1918년에 탄생한 체코라는 단어가 지닌 짧은 역사성 때문이다.

그는 저서 '소설의 기술'에서 "단단하지 못한 단어 위에 억지로 나라는 세울 수 있겠지만 소설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체코 대신 그가 사용한 단어는 '보헤미아'였다. 낡았지만 수많은 세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헤미아'라는 단어는 시적이라고 쿤데라는 설명한다.

세례 요한 스테인드글라스. 체코 보헤미아 유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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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등과 함께 중앙유럽 혹은 중부유럽을 구성하는 주축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헝가리 대평원, 우크라이나 대평원 등을 통해 아시아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자주 아시아의 호전적인 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5세기에는 아시아계인 훈족의 지배를 받았다. 게르만인, 슬라브인들은 훈족의 족장 아틸라의 휘하에 들어가 로마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아틸라의 죽음으로 훈족이 무너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르족이 중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역시 아시아 초원지대에 뿌리를 둔 기마민족이었다. 갑작스럽게 아바르족이 사라진 후에는 헝가리를 지배한 마자르족이, 마자르족이 가톨릭교를 수용한 후 유럽 국가가 된 이후에는 몽골군이 중부 유럽을 휩쓸었고, 그로부터 몇백년이 지나지 않아 오스만 튀르크가 이 지역을 유린했다.

베르디 오페라 '아틸라' 중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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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략의 역사 속에서 중앙 유럽인들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공포가 싹텄다. 그들은 훈족, 몽골족, 튀르크족과 같은 아시아 초원에서 기원한 기마민족들을 '개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사람의 몸에 개의 머리가 달렸다는 뜻이었다. 종교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마르틴 루터 같은 종교인조차 "오스만인(튀르크족)은 개와 결혼해서 잡종을 낳았다"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했다. 루터뿐 아니다. 중앙 유럽인들은 사제들을 죽이고, 포로들을 잡아먹고, 손톱이 긴 여전사들이나 아마조네스 전사들과 어울리는 그런 포악한 존재로 아시아 기마민족을 묘사했다.

과한 표현이지만 이들이 그처럼 높은 수위로 아시아 기마민족을 표현한 건, 그만큼 아시아인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훈족과 몽골족을 비롯한 기마민족은 상대가 저항할 경우 손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가령,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는 헝가리를 공략할 때, 군인뿐 아니라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까지 살해했다. 당시 헝가리 인구의 3분의 1이 몽골 침입에 따른 직간접적 영향으로 죽었다. 몽골군이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침략했을 때, 사람은 다 죽고 올빼미들만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사료에 있을 정도였다.

몽골군, 영화 '몽골' 중

[이타르타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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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럽에 대한 야욕은 아시아인만 가진 건 아니었다. 1500년 이후에는 프랑스인, 스웨덴인, 러시아인 등 사방팔방에서 침략자들이 나타나 중앙유럽을 약탈했다. 가히 수난의 역사라 할 만하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의 슬라브동유럽대학 교수인 마틴 래디는 신간 '중앙유럽 왕국사'(까치)에서 "침략은 중앙유럽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주제"라고 말한다.

최근 출간된 '중앙유럽의 왕국사'는 로마제국 시대부터 2000년대까지 약 2천년의 역사를 기록한 두툼한 역사서다. 저자인 래디 교수는 외세의 잦은 침략 속에 부상한 왕가와 몰락한 가문의 이야기를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엮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복잡다단한 중앙유럽의 역사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까치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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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럽은 합스부르크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지속해 분열된 상태였다. 당대 최고의 장수이자 황제였던 카를루스 마그누스(카를대제)는 거대한 프랑크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고도 유산 정리를 잘 못해 왕국이 분열되는 실마리를 제공했고, 마그누스의 후손들이 세운 '신성로마제국'도 자손들의 지리멸렬로 수백 개의 작은 공국으로 분열됐다.

책은 합스부르크가가 대두한 사연과 중앙유럽이 서유럽보다 보수적인 문화를 지니게 된 배경, 중앙유럽을 뒤흔든 프랑스혁명의 영향, 양차 대전 후 폭발한 민족주의 물결, 소련 해체와 더불어 진행된 민주화 등 주요 변곡점들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중부 유럽 사람들이 겪은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담대함과 공포, 안심과 상심의 감정도 함께 전한다. 그 긴 도정과 오르내리는 감정의 파고를 따라가다 보면, 조국을 체코가 아닌 '보헤미아'로 쓴 쿤데라의 마음이 어느 정도 느껴질지도 모른다.

박수철 옮김. 736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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