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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honey] 지친 영혼을 달래줄 안동 '금소마을'
입력 2025.11.05 12:31수정 2025.11.05 12:31조회수 0댓글0

안동포 장인의 베틀가 소리 들려오는 대마특구


경북 안동시 금소마을 대마 밭에서의 명상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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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해 질 녘 무거워진 10월의 햇살이 길안천 하얀 돌다리 위로 떨어졌다.

가마우지 한 쌍의 낮은 비행, 고택 담장 너머로 익어가는 홍시. 건들바람에 대마 숲은 작은 소리로 울고, 비단 휘감듯 수로는 마을 길을 따라 흐른다.

안동 금소마을. 꾸미지 않은 소박함 그대로 지친 영혼을 달래줄 이런 마을이 또 있을까.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 옥난간에다 베틀을 놓세

베틀 다리는 뉘다리요 요내다리 얹혀서 육다릴세

베 짜는 김영숙 안동포 이수자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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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금소마을의 안동포 장인 2명이 마을의 고택 금곡재 대청마루에서 '베틀가'를 신명 나게 불렀다.

베틀가는 노동요다. 듣는 사람에겐 흥겹게만 들릴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농사일과 집안일에 시달린 아낙네가 지친 몸으로 베를 짜기 위해 베틀 앞에 앉아 부르는 노래다. 긴 세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설움을 노랫가락에 실어 보냈을까.

대마특구로 지정된 금소마을에서는 안동포 장인들의 생생한 베틀 소리와 노랫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대마 숲에서의 명상, 대마 뿌리를 넣은 닭백숙 식사, 대마 줄기로 만든 '소원등 띄우기' 등 대마와 그 줄기로 만든 안동포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사단법인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와 로컬체험 전문 여행사 '길과 마을'이 마련한 1박2일 금소마을 촌캉스 프로그램 시즌2 '대마민국'에 다녀왔다.

안동 송강미술관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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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예술의 새 중심 '송강미술관'

금소마을을 탐방하기 전에 안동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들른 곳은 송강미술관이다.

대신종합건설 정해룡 대표와 부인 김명자 시인이 폐교된 송강국민학교 땅을 매입, 7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23년 6월 개관했다.

'개인이 세운 그렇고 그런 작은 지역 미술관이겠지'라는 생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미술관 초입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로부터 시작해, 현대적 감각의 세련된 건물과 정원의 조각품, 높은 수준의 다양한 전시작품들을 보고 나면 이곳이 왜 고도(古都) 안동이 자랑하는 예술의 중심이 됐는지 알게 된다.

안동 송강미술관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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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회탈 전시관이 보인다.

고려시대 안동 하회마을에서 제작돼 현재 국보로 지정된 11개 탈의 원본은 안동시립미술관에 있지만, 탈에 얽힌 흥미로운 설명은 이 미술관에서만 들을 수 있다.

화를 내지만 고개를 숙이면 웃는 모습이 되는 양반탈, 오른쪽에서 보면 유독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하는 선비탈, 까불거리지만 콧대 높은 초랭이탈, 그 시대 여인상을 재현한 각시탈 등.

큐레이터의 설명이 듣다 보면 어느새 천 년 전 소박한 일상사와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았던 민초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게 된다.

임정혁 선임 큐레이터는 "당시 유럽의 예술이 권력자를 위한 예술이었던데 비해 하회탈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며 "역사상 이렇게 위대한 예술작품이 또 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송강미술관 하회탈 전시관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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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 세월의 흔적

미술관에는 연중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기획전시 외에 조선시대와 20세기 초에 실제 사용된 떡살과 다식판 컬렉션 1천여점 중 200여점을 볼 수 있는 떡살 전시관, 안동 지역 문인들의 각종 작품과 친필 편지 등을 전시한 문학관도 있다.

꼼꼼히 하나씩 살펴보고 싶은 욕심은 '반드시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으로 대신하고 금소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20분쯤. 금소마을에 근접하자 주변 산의 풍경이 특이했다. 산마루에 선 나무들이 뾰족뾰족 성냥개비를 꽂아놓은 듯 보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산불로 다 타버린 나무들이라는 것을.

금소마을은 지난 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곳이다. 마을 입구엔 이재민들을 위한 조립식 주택도 보인다. 다행히도 마을에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문화재급 고택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안동 금소마을 전경. 위쪽에 산불의 흔적이 보이고, 아래쪽에 이재민을 위한 조립식 주택이 보인다.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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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담장 밑에서 분꽃과 마리골드가 반긴다. 이어 등장한 허름한 농협창고. 깔끔하게 개조해 지금은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가 됐다.

그 뒤로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살가운 바람에 몸을 흔든다. 얼핏 보면 평범한 농촌이지만, 눈썰미가 있다면 금방 알 수 있다. 돌담 밑 아담한 수로로 맑디맑은 물이 흐르고, 작은 물고기가 물살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몇 걸음 안가 담장 너머로 고택의 지붕들도 보인다. 천년 세월의 흔적이다.

안동시 금소마을의 누렇게 익어가는 벼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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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 뿌리를 넣은 백숙

마을 남쪽으로 낙동강 지류인 길안천이 흐르고 천 너머는 생태공원이다. 이름은 공원이지만, 데크 길과 파크 골프장을 빼면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따박따박 네모 반듯이 이어 놓은 돌다리를 성큼 건너면 비봉산 아래 풀숲과 물길이 번갈아 눈을 즐겁게 한다.

천변엔 두루미와 황새가 자태를 뽐내고 물 위엔 청둥오리가 떠 있고 그 위를 한 쌍의 가마우지가 스치듯 날아간다. 이곳에서만 하루라는 시간을 온전히 써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낙동강 지류인 길안천과 금소생태공원 전경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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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 예천 임씨 금양파 종택 마당이 식사 장소다.

금소마을은 예천 임씨와 울진 임씨가 함께 살아가는 두 성씨의 집성촌이다. 금소1리에 울진 임씨, 2리에 예천 임씨가 산다.

오래전부터 두 집안은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어울려 살았다. 옛날엔 두 마을 사이 벼를 베고 난 공터에서 차전놀이를 했다고 한다.

고택 뒤 언덕에 우거진 대나무숲은 이 마을 참새들의 아파트 단지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참새들이 떼를 지어 오간다.

5대째 물려온 가마솥에 대마 뿌리와 찹쌀, 마늘, 대추, 녹두 등을 넣고 2시간 넘게 우려낸 토종닭 백숙은 그 어디서도 경험하기 어려운 깊은 맛과 부드러운 식감을 선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의 치매 발생률이 낮은 이유를 대마 효과라고 믿는다.

안동 금소마을 예천 임씨 금양파 종택 마당 앞의 익어가는 감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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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도 향기도 다른 대마 숲

해가 지고 마을 하늘에 별들이 등장했다. 꽃이 지면 별이 되는 걸까. 밤이 오니 이곳이 농촌임을 실감한다.

두둑해진 배를 안고 마을 한가운데 수로 옆 작은 공원에 모였다. 대마 줄기로 만든 뗏목 위에 각자의 소원을 적은 한지를 접어 작은 등과 꽃잎 등으로 장식한 뒤 수로에 띄운다. 소원등 띄우기 프로그램이다.

200m쯤 걸어가면서 내 소원의 뗏목이 물길을 헤치며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소원등이 물 위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니 운치도 그만이다.

소원을 적은 한지는 건져내 나무줄기 위에 매달아 놓았다가 내년 정월 대보름 때 모아서 태운다고 한다.

금소마을 대마줄기로 만든 소원등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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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 문화예술사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외지인들이 걸어놓은 한지를 보면서 함께 그 소원이 이뤄지길 빌어준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7시. 대마 숲에서의 명상 시간이다. 대마 숲 한가운데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니 공기도, 향기도 달랐다.

대마잎이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만큼 이곳은 CCTV가 설치된, 경찰의 특별 관리구역이지만, 명상 목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참가한 일행은 두 줄로 마주 보고 앉아 박찬희 해설사의 지도와 낭랑한 싱잉볼 소리를 들으며 30분가량 이른바 '대마 숲 명상'을 했다.

싱잉볼 도구를 구입해 집에서도 해볼까 잠시 욕심을 내본다. 어디서 하든 명상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안동 금소마을 대마밭에서의 명상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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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골이 난 여인들

"사람은 남의 집에 살아도 베는 남의 집에 못 삽니다."

안동포 이수자인 김영숙 씨는 안동포 짜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씨실과 날실이 한 올이라도 정확히 자기 집에 위치하지 않으면 삼베를 짤 수 없다는 말이다.

대마의 껍질을 벗기고 실을 뽑아 머리와 꼬리를 잇고 베틀에 집어넣어 직물을 짜는 일까지 총 18개 세부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진다.

실을 아랫니와 윗니 사이에 넣고 물어 쪼개다 보면 어느새 이에 골이 파지게 되는데 '이골이 난다'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왔다.

금소마을 금곡재에서 고갑연 안동포 이수자가 실을 쪼개고 있다.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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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안동포 한필(22m)로 여성 한복 2벌 정도를 만드는 데 거의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지금은 전통을 잇기 위해 안동포를 짜지만, 옛날에는 이 일이 생활이었다.

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 임방호 회장은 "어릴 때만 해도 집집마다 달그락달그락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렸다"며 "그때만 해도 이 마을에서 안동포 짜는 분이 800명은 됐는데 지금은 40명 정도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금소마을 안동포로 만든 옷감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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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양연화

안동포 짜기 전통 베틀 시연을 보고 베틀가도 듣고 고택을 나섰다. 여인네들의 고된 삶이 베인 가사와 그 투박한 노랫가락이 귓바퀴를 맴돈다.

잠깐의 자유시간. 아침 식사를 했던 식당 건물 앞에는 언제든 무료로 탈 수 있는 자전거가 여러 대 비치돼 있다. 한 대를 빌려 길안천변을 1㎞쯤 달렸다.

왼쪽에는 범상치 않은 비봉산 자락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른쪽으로는 사과나무가 빽빽이 심어진 과수원 풍경이 나타났다.

안동 금소마을 인근 낙동강 지류인 길안천의 돌다리 [사진/임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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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갈암 이현일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나 3년간의 말년을 이 마을에서 보냈다고 한다.

비단 같은 수로, 양지바른 들판,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물, 그 물로 지은 맛 좋은 쌀과 그 쌀로 빚은 술이 익는 마을.

하늘 가득 총총히 박힌 별들과 들려오는 베틀 소리. 갈암 선생이 그렇게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로 여생을 즐겼던 곳이 금소마을이다.

이 마을에 대해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있다. 금소마을에서 다시 만난 화양연화라는 뜻의 '금양연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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