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 건너 한 집만 김장하는 시대로…바뀐 생활양식·가족구조에 변화 불가피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찬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기 시작하는 매년 이맘때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동네 어귀나 큰 집 마당 등지에 여인들이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 모여들어 함께 배추를 절이고 양념에 버무리던 모습이 정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크고 빨간 고무대야도 잊히질 않는다. 겨우내 온 식구의 주된 반찬이 될 김치를 담그는 작업, 바로 '김장'이다.

이웃사랑 새마을 김장 나눔
(수원=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4일 경기도 수원종합운동장 주차장에서 열린 '이웃사랑 새마을 김장 나눔'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다. 2026.11.4 xanad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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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 많이 드는 큰일이어서 혼자서는 하루 안에 끝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웃끼리 서로 품앗이했다. 누구네 집에 김장이 예고됐다면 동네 주부들이 시간을 미리 맞춰 다 모여 도왔다. 그래도 한나절 넘게 걸리는 고된 일이지만 왁자지껄 함께 근황과 고민을 나누다 보면 힘든 걸 잊을 수 있었다. 김장하는 날엔 돼지고기 수육도 삶았다. 수육을 겉절이김치에 싸서 엄마 따라온 아이들 입에 넣어주던 모습도 정 넘치던 기억이다.
이처럼 김장은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혹독한 겨울의 삶을 서로 챙기고 대비하는 상호부조의 정신적 공간이었다. 서로의 양식을 함께 준비하고 이웃 간 정과 마을 공동체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사회적 의식'으로 긴 세월을 이어져 왔다. 지난 2013년 유네스코가 한국의 '김장'(Kimjang)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이런 사회적 문화를 평가한 데 따른 결과다. 김치라는 음식이 아니라 김장이란 행위로 얻는 공동체 연대감, 세대 간 전승과 정체성, 환경친화적이고 지속 가능한 지식 등에 점수를 줬다.
김장 문화는 작물을 못 키우는 추운 겨울에 채소를 먹고자 소금에 절여 저장하던 지혜에서 기원했다. 삼국시대부터 절인 채소를 뜻하는 '침채'(沈菜)가 존재했던 걸로 추정되는데, 문헌상 확인된 건 고려 때부터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무를 소금 또는 장에 절여 저장해 겨울과 여름을 대비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처럼 빨간 양념을 입은 김치는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16~17세기 무렵 등장했다. 국립국어원과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따르면 김장의 어원은 채소를 절여 저장한다는 뜻의 한자어 '침장(沈藏)'이다. 음운 변천 단계를 거쳐 침장은 김장으로, 침채는 김치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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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김장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최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자료에 따르면 올해 직접 김장하는 가구는 작년보다 5.6%포인트나 감소한 58.6%로 조사됐다. 사상 처음으로 60% 선이 붕괴해 50% 대로 추락한 것이다. 금세기 초반까지도 직접 김치를 담그는 가구 비율이 90%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이제는 2가구 중 1가구 정도만 김장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김포족'(김장포기족)이란 말도 나왔다.
이런 현상은 식생활과 식습관 변화, 외식문화 확산, 세대교체, 1~2인 가구 증가, 가사노동관 변화, 김치 제조산업 성장, 온라인 유통망 발달 등 여러 생활 양식 변화에 기인한다. 혼자 또는 둘만 사는 가구가 늘고 맞벌이가 급증하니 김장할 여유도 없고 김치를 많이 담글 필요도 없어졌다. 외식하거나 배달 음식을 먹는 빈도도 높아졌다. 완제품 포장김치를 사 먹는 비율도 3가구 중 1가구 비율로 크게 늘었다. 사람들이 김치를 예전만큼 많이 먹지 않는 것도 있다. 특히 입맛이 서구화한 젊은 층은 과거 기성세대처럼 '김치 없이는 못 살아'가 아니라고 한다.
이제 김장은 월동 준비를 위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생활 습관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인식된다. 앞으로 1~2인 가구는 계속 늘 것으로 예상되고, 김장을 떠나 음식 자체를 집에서 조리해 먹는 가구도 점점 줄 거란 분석도 있다. 동남아시아에선 집밥보다 외식에 의존하는 문화가 정착된 나라들이 이미 꽤 된다. 우리 역시 배달 음식과 외식 수요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지금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김장을 하는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장은 지난 2017년 '국가무형유산'으로도 지정됐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런 속도면 김장 문화는 머지않아 판소리, 전통 옻칠, 전통 굿처럼 소수가 전승하는 무형문화재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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