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방문 연수 통해 '정체성·진로' 재정립…"카자흐스탄 고려인 돕는 것이 삶의 목표"
고려인 선배 강연·창업 사례서 '가능성' 확인… 현지서 1만 학생 교육 프로그램 기획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고려인 4세 윤에스더 씨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고려인 4세 윤에스더 씨가 지난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 12. 4. phyeonsoo@yna.co.kr
원본프리뷰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고려인도 한국서 전문 분야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 가능성을 더 많은 고려인 청년들과 나누고 싶어요."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4세 윤에스더(26) 씨는 지난 1~5일 재외동포청(청장 김경협) 산하 기관인 재외동포협력센터(센터장 김영근)가 주관한 '2025년 차세대동포 청년 5차 모국 초청연수'를 마친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참가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윤 씨는 "이번 방문은 단순한 견학이 아니라, 고려인으로서의 뿌리와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와 인하대를 방문해 강연을 들으며 큰 울림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인하대 이진형 교수의 강의에서 "고려인들의 한국 정착은 외국인의 '이주'가 아니라 모국으로의 '귀환'" 이라는 설명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그동안 많은 고려인이 한국행을 '유학'이나 '이주'로만 생각했는데, 우리의 뿌리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돌아갈 수 있는 '모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 살펴보는 윤에스더 씨
[재외동포협력센터 제공]
원본프리뷰
그는 또 우즈베키스탄 출신 박엘레나 씨가 한국에서 온라인 한국어 교육 플랫폼을 창업한 사례도 인상적이라고 했다. "고려인도 공장 노동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됐다"며 "수요를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설계하는 방식 자체가 큰 배움이 됐다"고 전했다.
현재 윤 씨는 카자흐스탄 최대 규모 입시교육센터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교육센터는 5개 도시에 12개 분원을 두고 있으며 1만여 명의 학생이 다닌다.
그는 600명 이상의 학생을 직접 상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공부를 흥미롭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중학생을 위한 노래 기반 영어활동, 신년 테마 수업, 퀴즈 프로그램 등 스트레스 완화형 학습 활동을 운영하고, 고등학생에게는 주 1회 스포츠·독서 클럽 등 교실 밖 활동을 제공한다.
윤 씨는 "아이들이 공부를 의무로 느끼지 않도록 동기를 북돋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순간들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했다.

2025년 차세대동포 청년 5차 모국 초청연수 개회식
(서울=연합뉴스) 지난 1일 서울 메이필드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차세대동포 청년 5차 모국 초청연수 개회식에 참여한 윤에스더(왼쪽서 첫 번째)씨. 왼쪽서 3번째는 김경협 재외동포청장, 맨 오른쪽은 김영근 재외동포협력센터장. [재외동포협력센터 제공]
원본프리뷰
윤 씨의 정체성 형성의 출발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치원 때부터 한복을 입고, 한국어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고려인 문화를 접했고, 부모님의 교육과 한국 음식·전통 경험이 정체성의 기반이 됐다.
다만 그는 "주변의 많은 고려인 친구들이 자신의 뿌리와 강제이주 역사를 잘 모르는 현실을 보며 정체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고교 시절부터 커버댄스 대회 운영, K-팝 스타 행사 진행, 한국-카자흐스탄 스포츠 페스티벌 봉사, 설날 콘서트 참여 등 문화 활동에 적극 나서며 고려인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색동옷 입은 윤에스더 씨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2000년 6월 색동옷을 입은 윤에스더 씨가 돌잔치에서 돌잡이를 하는 모습. 왼쪽부터 할머니, 윤에스더, 언니, 모친. [본인 제공]
원본프리뷰
윤 씨는 대학 진학 당시 재외동포협력센터 프로그램이나 글로벌 코리아 장학금(GKS)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고려인 청년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장학금 공지가 나오면 지인들에게 빠르게 전달하고, 필요할 경우 서류 작성까지 도와준다.
그는 재외동포협력센터 현지 장학생으로 두 차례 선정돼 여름 모국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신청자가 적어 배정 인원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어, "더 많은 고려인 청년이 이런 기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씨의 가족사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부모와 조모는 모두 카자흐스탄 출신이며, 조부는 사할린에서 나고 자란 뒤 구소련 시절 한국어 신문인 '레닌기치'에서 기자로 일하다 카자스탄으로 이주해 고려일보 부주필을 지냈다. 증조부모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다.

유치원 행사서 색동옷 입은 윤에스더 씨
[본인 제공]
원본프리뷰
윤 씨 언니 역시 재외동포협력센터 초청 장학생으로 한국어교육 석사 과정을 마친 뒤 한국에 정착해 온라인 한국어 교육과 K-팝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러시아어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윤 씨는 한국에서 교육심리학 석사 과정을 고려하고 있으나, 현재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신중한 입장이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의미 있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어요. 단지 기회가 있다고 유학을 택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명확한 목적이 생긴다면 언젠가 한국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는 인생의 목표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교육 활동, 동포 청년들의 장학금 신청 지원 등 현재의 모든 활동이 그 목표의 연장선이다.

구소련 시절 한국어 신문 '레닌기치' 언론인들
1980년 구소련 시절 한국어 신문인 레닌기치 소속 언론인들. 앞줄 왼쪽서 첫 번째가 윤에스더 씨 조부인 윤수찬 기자. 윤 기자는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고려일보 부주필을 지냈다. [본인 제공]
원본프리뷰
윤 씨는 "고려인 정체성이 지금 세대에서 단절되면 단지 '성씨'로만 남을 수 있다"며 "정체성은 그냥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꾸준히 노력하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지켜지는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외동포청과 재외동포협력센터는 전 세계 고려인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이런 연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강조했다.
phyeonsoo@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