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가치있는 삶 살아야"…시인 정호승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직장갑질 119 윤지영 대표
"몸과 마음 깨끗하게 사는게 내 삶의 원칙"…작가 김홍신
[※ 편집자 주= [삶] 인터뷰이들의 좌우명, 삶의 원칙을 다룬 이번 특집기사는 내용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첫 번째이며, 두 번째 기사는 다음 주 초에 송고할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박세리 전 골프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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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삶] 인터뷰이들이 말한 삶의 원칙은 다양했다.
특징이 있다면 이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치열한 삶,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돕는 이타적인 삶, 역경을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삶의 구체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는 인터뷰이도 꽤 있었다. 예상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많아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은 데다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2022년 9월부터 진행된 [삶] 인터뷰 송고 내용 가운데 인터뷰이들이 언급한 삶의 좌우명과 목표, 원칙 등을 골라 별도로 묶은 것이다.

맨발의 박세리
1998년 제53회 US여자오픈골프대회 18번 홀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속에서 샷 하는 박세리. 그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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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리 전 골프선수
부지런히, 열심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내 좌우명이다. 일하고 있고, 기회가 있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항상 감사하다. 나는 그동안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 시절 나도 느닷없이 슬럼프가 왔다. 내가 게을러졌거나 운동선수로서 (치열한) 마인드를 잃은 것도 아니었다. 슬럼프가 올 가능성에 대비한 훈련까지 했던 사람이었기에 정신적 혼란이 매우 컸다. 1년 6개월 정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악몽 같았다.
주위에서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는 말이 전혀 괜찮게 들리지 않았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 제발 혼자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대인기피증까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반 미친 사람처럼 노력했다. 잠도 덜 자고 더 많이 연습했으며 먹는 것, 자는 것 모든 것을 철저하게 했지만, 점점 나빠졌다. 그때 손가락 부상까지 와서 아예 골프채를 잡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어느 날 지인이 낚시를 권했고, 그걸 하면서 마음이 서서히 정리됐다. 다시 연습하면서 나한테 스스로 이야기하곤 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좋아졌고,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지겠지" 어느 순간 다시 우승하게 됐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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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 시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1973년 등단 이후 1980년대까지 시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시를 쓴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인간인 나 자신의 눈물을 닦기 위해서 시를 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나는 이제 70대 후반이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남아 있는 인생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시간을 만들어서 열심히 시를 쓰고 싶다. 내 가슴속에 더는 시가 남아 있지 않아서 이제 죽어도 아쉬운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은 시인이다. 사람들이 자기 생업 때문에 시를 쓰지 않아서 시인이 대신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시를 읽을 때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시인이 무슨 의도로 썼을까를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시를 읽는 나의 마음, 내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작가 김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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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인간시장' 작가 김홍신(전 국회의원)
내 삶의 원칙은 남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기쁨이 되게 살자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내가 꼭 남들에게 기쁨이 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실수한 게 많았다. 또 다른 원칙이 있다면 깨끗하게 살자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 점에서 저의 어머니와 친지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국회의원 시절 내가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기 때문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됐다고 하니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한테 와서 여러 가지 부탁을 했다. 나한테 직접 말하기 어려우니 어머니를 찾아간 것이다. 어머니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나는 우리 아들을 그렇게 안 키웠다"면서 되돌려보냈다. 그러니 어머니가 욕을 다 먹었다. 친구들도 나한테 들어오는 부탁을 차단했다. 그들은 누군가가 부탁하려 하면 "그 사람한테 그러지 마라. 지금까지 자기 성질대로 살았는데, 부탁하는 순간, 너와의 인연이 끊어진다"고 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자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나는 돈 봉투를 거부하고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드렸다. 1주일 뒤에 그분이 또 오셨다. 나는 "그러면 제가 이걸 검찰에 넘기고 고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배님, 이거 가져가세요"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내가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였다. 어떤 분은 장관이 되자마자 나한테 돈 봉투를 가져왔다. 나의 보좌진과 식사하라고 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우리 보좌진과 식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거는 내 돈이죠?. 그럼, 장관이 되신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이걸 드릴 테니 장관님이 간부들과 식사하십시요"라고 했다. 그분은 "왜 이러십니까?"라고 했고, 나는 "내 돈이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돈을 그대로 가져갔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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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내 삶의 원칙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나에게 성공은 내가 가진 힘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아낌없이 쏟는 것이다.
나는 오지 여행을 하다 여러 참상을 보게 됐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갔는데, 아이들이 온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동양인이라서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손에 꽃반지와 시계를 그려주면서 함께 놀았다. 사진 찍을 때 혓바닥을 내미는 아이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다른 곳에 갔다가 며칠 후에 그 마을에 들렀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어디에 숨은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마을에 급성 설사가 돌아 아이들 몇 명이 갑자기 숨졌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부르게 먹지 못한 아이들이 설사하다 죽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링거 한 병이면 치료가 가능한데, 구하지 못했다. 죽어야 할 목숨이 아닌데, 너무 분했다. 링거 1명은 1달러 정도다. 한국 돈으로 1천원 조금 넘는 수준이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는 아이들과 놀았는데, 지뢰를 밟아서 발 하나가 없어 목발을 짚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내가 난민촌을 떠날 때 그 아이가 빵을 건넸다. 놀아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뭐라도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난민촌에서 빵은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소중한 식량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난민구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귀국 후 때마침 월드비전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김재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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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 김재련
내 삶의 원칙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오래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넘겨짚어 미리 파악하려 하지 말고, 누가 이야기를 하면 그대로 믿어주고자 한다. 그리고 매 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삶의 목표는 없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 데다 내가 꼭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다음 세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에 충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해(害)보다는 도움이 되고. 내가 힘들 때 위로받고, 누가 힘들어할 때 도와주고 싶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살다가 어느 날 삶의 마지막 시점에 왔을 때 그동안 해보고 싶은 것 중에 못 한 것이 있어서 후회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과거에 의뢰받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남편이 자신의 애인을 집에 들여놓고 살면서도 이주민 여성인 부인의 여권 등을 모두 빼앗아 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여자 두 명과 사는 그는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맨발 상태로 집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시아버지가 이주민 며느리를 학대한 사건을 담당한 적도 있었다. 남편은 지적으로 장애가 있었는데, 시아버지는 이주민 며느리가 임신하도록 하기 위해 병원에 끌고 다녔다. 생리대를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하면 생리 여부를 확인한다며 화장실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1960년대, 1970년대 우리 누이들도 미국이나 독일에 가서 힘들게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한국에 있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동남아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결혼 이주민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 본국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직장갑질119 윤지영 대표
[촬영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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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갑질119 윤지영 대표(변호사)
나의 좌우명은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변하지 않기 마련이고,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결국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진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내가 믿는 신념은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내가 지금 표현하지 않아도 진심은 언젠가는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단체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갑질에 대한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갑질에는 괴롭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터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당한 행태가 갑질이다. 직장에서 갑질을 없애고, 일하는 사람 누구나 존중받고 안전하게 일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시멘트를 만드는 한 대기업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석회석을 채굴하는 사람들이었다. 형식적으로는 하청업체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대기업이 직접 일을 시켰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위장도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대기업은 더는 일을 안 줬고, 하청업체는 폐업을 해버렸다.
노동자들이 해고된 것이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자 대기업은 이들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나는 이들의 법률대리인으로서 소송에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이 대기업이 이들 모두를 정규직 사원으로 고용키로 했다. 내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연합뉴스와 [삶] 인터뷰 중인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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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의 조명숙 교장
잘살자는 것, 열심히 살자는 것이 내 삶의 원칙이다. 나는 죽을 때 나의 삶이 부끄럽지 않고, 민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중국에서 탈북민을 도울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16세가량의 북한 남자아이가 울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팔다리가 삐쩍 말랐고, 끔벅끔벅하는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얼굴은 못 먹어서 부었고, 세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옥수수를 싣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온 열차가 있었다. 그 안에 몰래 들어간 그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그 열차가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부모는 식량난으로 이미 죽었고, 동생 두 명이 북한에 있었다. 극심한 기아 상태였던 그 아이는 굶고 있는 동생들을 살리러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한참을 울었다.
일단 음식을 먹인 뒤 호주머니에 약간의 돈과 사탕, 엿 등을 넣었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먹을 게 아니다. 북한으로 가는 과정에서 빼앗길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빼앗길 것이 있으면 잡혔을 때 덜 맞는다. 우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달러를 작게 접어서 비닐에 싼 뒤 그 아이의 항문에 넣어줬다. 실로 연결해 잡아당겨 뺄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이 돈을 빼앗기지 말고 북한에 들어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숨죽여 지켜봤다. 다행히 그 아이는 총을 맞지 않고 무사히 건너갔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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