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문학의 효용 묻는 9편 수록
'이야기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소설가로서 고민 담아
구멍 뚫린 그림이 눈 오는 풍경으로…"보이지 않는 것 꿈꿔야"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 펴낸 소설가 김연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펴낸 김연수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14
ryousant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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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어느 글에서 문학의 쓸모란 쓸모없음에서 나온다며 유려한 논리를 펼쳤다.
대개 유용함은 사람을 억압하기 마련이며, 문학이란 써먹을 데가 없기에 억압에서 자유롭단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억압된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게 김현이 말하는 문학의 쓸모다.
그런데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소설이 과연 우리 삶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4년 만에 새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문학동네 펴냄)를 낸 김연수(56) 작가는 이런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한다. "소설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새 책에는 제각각 소재는 다르지만, 문학의 효용을 묻는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렸다.
13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에서 만난 김연수는 "등단한 지가 30년이 넘었는데 40대쯤 되어서 '소설을 쓴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며 이번 소설집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소설 쓰는 일에 대한 고민은 '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낭독회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와의 접점을 늘렸다. 최근 몇 년간 전국 곳곳에서 낭독회를 열었고, 낭독이 끝날 때마다 독자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각각의 너무도 절실한 삶을 만나며 작가에게는 질문이 생겼다. '나의 이야기가 과연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질문에 작가 스스로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 펴낸 소설가 김연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펴낸 김연수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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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어를 다루는 예술이고 언어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도구입니다. 언어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안향미라는 인물의 삶을 예로 들었다.
안향미는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최초의 여성 선수로, 1999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의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여자 프로 야구' 선수라는 꿈을 처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여성을 야구장으로 끌어내며 '여자 프로 야구'가 현실이 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이번 책의 문을 여는 '우리 인생의 목격자'는 안향미 선수가 모티프가 된 소설이다.
어린 시절 투수를 꿈꾸던 주인공 선희는 오랜 세월이 흘러 미국에서 여자 프로 야구가 출범하고, 한국인 선수들이 지명받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 꿈을 떠올린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또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게 됐어."(32쪽)
김연수는 '여자 프로 야구'란 단어에 주목했다.
그는 "처음엔 실체도 없는 개념이었지만, 먼저 누군가가 그 말을 쓰고, 그 말에 의해 시차를 두고 실체가 생겨났다"며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보려 할 때 상상도 못 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 펴낸 소설가 김연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펴낸 김연수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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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또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에 빗대어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때, 그것은 끝이 아니고 과정일 수 있으며, 어떤 일이 끝이냐 과정이냐는 자기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믿고 바라보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는 "작가로서 모든 이야기는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며 "누군가 자기 인생을 되게 형편없는 이야기로 여긴다면 이를 얼마든지 다른 버전으로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을 소설로써 알려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수록작 '조금 뒤의 세계'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두가 끔찍하다고 말해도 끔찍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다른 걸 보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이 하는 일이야. 이 현실에는 현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다른 것에 집중할 때, 너는 네 인생을 바꿀 수 있어. 그 다른 것이 바로 꿈이야."(108쪽)
표제작인 '눈 내리는 삼일포'는 소설을 잉태하게 된 과정부터가 신비롭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연수는 2024년 여름 무렵 서촌의 한 식당에서 그림책 작가 이수지로부터 그림책 '눈 내리는 삼일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그림책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 '고성삼일포도'가 있다.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보관하던 중 좀이 슬어 구멍이 생겼는데, 이수지 작가는 구멍들을 삼일포 위로 내리는 눈(雪)으로 읽었다. 그리고 김연수는 이 그림책을 보며 소설 한 편을 길어 올렸다.
김연수는 이 작가의 그림책에 대해 "하얀 점이 처음에는 구멍인데 구멍이 눈으로 바뀌는 지점이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 펴낸 소설가 김연수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펴낸 김연수 작가가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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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은 궁궐 어의에게 덕암이라는 사내가 찾아오며 시작한다.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막내딸을 위해, 귀한 약재를 달라는 것이다.
어의가 요청을 거절하자 덕암은 당대 유명 화가인 현재의 그림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림에 좀이 슬어 구멍이 뚫린 것을 본 어의는 냉정하게 덕암을 물리치려 한다.
이에 덕암은 작품이 망가진 게 아니라 현재가 일부러 구멍을 뚫어 완성한 것이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의는 결국 그림을 받고 약재를 내어준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 이르러 그림에 얽힌 일화가 덕암이 지어낸 것이란 사실이, 그리고 덕암이 평소 소설을 '미혹'이라고 경멸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토록 소설을 경멸했던 덕암이 소설을 꾸며 딸을 살려낸 셈이다.
'눈 내리는 삼일포'는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작가가 내놓은 답이다.
소설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가장 문학적 방식의 간증인 셈이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인 김연수는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이듬해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와 평단의 폭넓은 사랑과 호평을 받았다.
그는 차기작으로는 오랫동안 써온 장편 소설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실제 임진왜란 때 조선 남해안에 들어온 스페인의 가톨릭 신부가 있었는데, 이 신부가 조선을 떠나며 일본으로 데리고 간 소년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는 귀띔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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