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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 살해범 검거에 유족 오열 "남편 영정 볼 면목 생겨"
입력 2026.06.10 02:21수정 2026.06.10 02:21조회수 0댓글0

연합뉴스 끈질긴 추적 보도로 공론화…정상회담 의제화 등 정치권도 관심
유족 "사법정의 실현 끝까지 지켜볼 것"…동포사회 "한인 범죄 근절 선례"


필리핀 한인 납치·살해 사건 피해자 고(故) 지익주 씨의 영정 사진

[유족 최경진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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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대사관에서 주범 검거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멍한 상태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어요. 10년 내내 '체포 의지가 있나' 하는 회의감에 밤잠을 설쳤는데, 그가 붙잡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2016년 10월 발생한 필리핀 한인 납치·살해 사건의 주범인 전직 경찰관 라파엘 둠라오가 도주 1년 9개월 만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9일(현지시간) 오전, 10년간 홀로 타국 사법부와 싸워온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 부인 최경진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거주 중인 최씨는 10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남편 영정을 보며 '당신을 억울하게 죽인 자가 드디어 잡혔다'고 이제야 비로소 고백할 수 있는 면목이 생겼다"며 10년의 피눈물 나는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듯 울먹였다.

이번에 전격 체포된 둠라오는 2016년 필리핀 현직 경찰들이 연루된 납치·살해 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2심에서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형 집행 직전에 필리핀 당국의 감시망을 뚫고 잠적했던 주범이다.

최씨는 거실에 있는 남편의 영정 사진을 언급하며 "고민거리가 있거나 남편이 보고 싶을 때 항상 향을 피우고 남편에게 말을 건네곤 한다"며 "당신이 하늘에서 도와줘서 주범이 잡힌 것 같다, 이제 더 마음 편하게 잘 지내라고 인사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이제야 겨우 한고비를 넘겼을 뿐"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최씨는 "전직 경찰 고위 간부인 범인이 돈과 권력을 이용해 병원 수감이나 보석 등 특혜를 받지 않도록, 앞으로 일반 교도소 독방에서 철저히 형기를 채우는지 끝까지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할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다.

아울러 곧 임기 종료로 필리핀을 떠나는 이상화 주필리핀 한국대사가 꾸준히 필리핀 당국과 소통하며 체포 결과를 이끈 점,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필리핀 정상에게 문제 제기한 점 등이 큰 힘이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 지익주 씨 8주기 추모식

(서울=연합뉴스) 2016년 필리핀 경찰관들에 의해 납치된 후 살해된 한인 사업가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의 8주기 추모식이 18일 사건 발생 장소였던 마닐라 경찰청 본부에서 열렸다. 사진은 이날 추모식에서 필리핀 경찰들이 헌화하는 모습. 2024.10.18. 2024.10.18 [필리핀한인총연합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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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단순 살인 사건을 넘어, 두테르테 정부 시절 필리핀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무고한 한인을 살해한 최악의 '셋업 범죄'(범죄 상황을 조작해 누명을 씌우는 것)로 기록돼 동포사회의 공포감도 컸다.

윤만영 필리핀한인총연합회장은 "현지 동포들은 지익주 사건 이후 경찰 제복만 봐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심리적 위축이 심했다"며 "이번 검거 소식에 우리 동포들은 한마음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소개했다.

윤 회장은 특히 이번 사건이 재외국민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한국인 등 외국인 대상 범죄에 현지 경찰들이 많이 연루돼 당국도 범인 검거에 굉장히 소홀했다"며 "최근 한국인 대상 범죄율이 크게 낮아졌다는 게 수치로 확인된다. 지익주 사건이 한인 대상 범죄 예방에 선례가 됐다"고 말했다.

또 "지난 3월 이 대통령의 필리핀 방문 시 동포 간담회 등에서 우리 정부가 보여준 관심이 큰 위안이 됐다"며 "한 번의 검거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필리핀 내 한인을 향한 셋업 범죄가 완전히 뿌리 뽑히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필리핀 당국에 지익주 검거 협조 요청

왼쪽부터 이상화 주필리핀 한국대사. 필리핀 내무부 장관, 필리핀 경찰청장. [유족 최경진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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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검거는 연합뉴스의 추적 보도와 이에 응답한 정부·국회 차원에서의 전방위적 압박을 통한 결실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연합뉴스는 외교 당국의 형식적인 대응을 질타하는 등 공론화했고,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의 날 선 지적도 이어졌다.

연합뉴스의 연속 보도는 이 사건을 단순한 재외국민 사건이 아니라 '국가 간 사법 공조'의 핵심 의제로 끌어올렸다. 2024년 10월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공동선언'에 국민 안전 보장 조항을 명문화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후 필리핀 내무부와 경찰청은 사건의 심각성을 재인식하며 지씨 추모식 규모를 확대하고, 유족과의 접촉을 늘리는 등 가시적인 변화를 보였다.

특히 사건 해결에는 필리핀 근무 당시 재외국민 보호의 최전선을 지킨 '코리안데스크' 서승환 경정(현 서울 영등포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의 집념도 큰 역할을 했다.

서 경정은 경찰 영사 등으로 있으면서 현지 경찰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납치범들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언을 끌어내 실체 확인의 교두보를 마련한 바 있다.

필리핀 한인 사업가 고(故) 지익주 씨(왼쪽)와 아내 최경진 씨

[유족 최경진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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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의 검거는 정의의 실현을 향한 큰 진전이지만, 피해 유족에 대한 필리핀 정부 차원의 공식 배상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2010년 마닐라 인질극 당시 홍콩 정부가 필리핀을 강하게 압박해 35억원 상당의 유족 배상을 받아낸 사례는 우리 정부가 나아갈 방향을 시사한다. 단순한 영사 조력을 넘어 국가가 재외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사법 절차를 존중하며 영사 조력을 다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유족과 필리핀 동포들은 범인 단죄를 넘어선 책임 있는 조치를 바라고 있어 향후 우리 정부의 후속 조치와 필리핀 당국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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