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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시인' 고선경 "달콤 쌉싸름한 사랑의 이면 보고 싶었죠"
입력 2026.04.23 02:20수정 2026.04.23 02:20조회수 1댓글0

통통 튀는 감각으로 젊은 세대 대변하는 '문단 아이돌'
창비서 세 번째 시집 '러브 온 더 락'…자본주의 시대 사랑 조명
발랄함·리얼리즘 동시에 품은 작품…한층 깊어진 주제의식 눈길


고선경 시인

[ⓒ 최기홍.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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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이 시집,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선명한 핑크빛 배경에 레오파드 패턴의 검은 얼룩무늬. 발랄하면서도 도발적이다.

창비시선의 535호를 장식하는 이 책의 제목은 '러브 온 더 락'. 이른바 '문단 아이돌'으로 불리는 고선경(29)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을 펼쳐보니 창비시선에선 볼 수 없던 아기자기한 '책꾸'(책 꾸미기) 스티커도 들어있다. 초판에만 들어있는 한정판이란다.

'MZ 세대'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소설가인 한로로는 추천사를 남겼다. 그는 "고선경의 텍스트는 당도 높다 이름난 모든 과일이 착즙된 향을 폴폴 풍긴다"고 적었다.

◇ '창비시선' 이름에 부담감도…"내 시를 돌아보는 계기"

"처음 창비에서 시집을 내자고 연락이 왔을 때 '왜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창비의 행보와 저의 색깔이 만나는 지점이 있나 의아했거든요."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만난 고선경은 창비의 출간 제안에 "너무 좋고 반갑고 영광스러운 한편으로는 긴장되는 지점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975년 신경림의 '농무(農舞)'로 첫발을 뗀 창비시선은 '민족'과 '참여'에 방점을 찍으며 한국 현대 시를 이끌어왔다.

그런 '창비다움'의 경계가 이젠 흐릿하다 해도 고선경이란 이름을 창비시선에서 만나는 것은 다소 의외로 다가온다.

편집자에게 자신을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발랄함'과 '리얼리즘'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시인은 미소를 띠었다.

1997년생인 고선경은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반짝이는 일상의 감각과 재기발랄함으로 한국 시단에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구축했다.

특히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2023),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2025)이 젊은 세대 사이에 큰 인기를 끌며 'MZ 시인'이란 수식어도 얻었다.

두 시집도 각각 문학동네와 열림원이란 굴지의 출판사에서 냈지만 고선경은 '창비시선'이란 네 글자에 부담도 느꼈다. 하지만 "부담 때문에 위축되기보다는 지금까지 써온 시와 앞으로 써야 할 시 사이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됐다"며 "그래서인지 문제의식이 훨씬 뚜렷해졌다"고 이번 시집을 소개했다.

러브 온 더 락

[창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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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우면서도 찌질한…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자화상 그려

새 시집에서 그가 파고든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사랑'이다.

고선경은 "사랑을 낭만적으로 다루기보다 그 안의 이면성이나 폭력성까지 드러내 보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보려 했다"고 말했다.

시집에서는 이별 앞에서도 감정의 잔량을 계산하고, 사랑을 하면서도 계산에 바쁜 '웃픈' 로맨스가 블랙코미디처럼 펼쳐진다.

시 '엔젤 오브 시티' 속 화자는 사랑을 나누는 천사 앞에서 "이 집 보증금이 삼천이야"라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또 "하느님께 기도드리자 입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라면서도 "나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빨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차에 치여 죽어도 빨간 페라리에 치일 건데"('GOTCHA' 중)라며 허세를 부리고, "우리는 이 케이크를 먹고 헤어지고요/ 남은 마음은 포장"('Guilty Favorite' 중)하자는 알뜰한 이별의 태도도 보인다.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현실 앞에 찌질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자화상인 셈이다.

특유의 재기발랄한 감각도 여전하다.

그의 시에서 사랑의 감각은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강렬한 맛과 향으로 다가온다.

"미끈한 턱을 타고 흘렀을 과즙"('고백' 중), "손바닥에 무른 딸기 냄새"('늦여름 동거' 중), "씁쓸한 오렌지 향기"('러브 온 더 락' 중) 등등.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침이 고인다. 첫입엔 달콤하지만, 쌉싸래한 끝맛이 남는 자본주의 시대 사랑의 맛이다.

그가 이렇게 사랑에 골몰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고선경은 "지금 제 삶을 가장 많이 점유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며 "단순히 연애라는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 끝내 실패하는 순간까지 곁에 있으려는 태도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너는 망고 씨앗이라도 씹은 것같이 질긴 표정을 짓는다 그래, 씨앗까지 핥아 먹는 연습을 해 (중략) 너는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지만/ 나는 사랑에 실패하지 않지"('오키나와 러브!' 중)

고선경 시인

[ⓒ 최기홍.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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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들에게 사랑 돌려주고 싶어"…자기 갱신 의지도

고선경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새로워지고 싶다는 자기 갱신의 의지도 밝혔다.

"꿈에서 시가 너무 안 써지는데 누가 막 이렇게 쓰라고, 시를 술술 읊어주더라고요. 그걸 그대로 받아 적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 시의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죠. 그게 너무 다행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는 "세 번째 시집 출간을 앞두고 '내가 과연 새롭게 느껴질까', '나에게도 새로움이 있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며 "일단은 기존의 익숙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새 시집에 수록된 '창조의 아침', '당신이 모르는 당신 이야기', '순수하고 뒤숭숭하며 존경스러운' 등은 이런 고민을 안고 쓴 시다.

'문단의 아이돌'로서 '텍스트 힙' 열풍의 중심에 섰던 그는 "지금껏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단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게 이 시집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시집의 첫 문을 여는 '고백'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자신에 대한 팬들의 열광과 환호가 끝난 자리에서도 끝내 사랑을 놓지 않겠다는 시인의 자기 고백이자 약속인 셈이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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