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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투칼럼] 라일라 오딩가: 케냐 정치 지형 바꾼 영원한 야당 주자
입력 2025.11.04 12:06수정 2025.11.04 12:06조회수 1댓글0

조준화 서울대 아시아-아프리카센터 선임연구원


조준화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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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케냐의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이자 전 총리였던 라일라 아몰로 오딩가(Raila Amolo Odinga)가 지난 10월 15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1992년 지역구 야당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대통령 선거에는 1997년, 2007년, 2013년, 2017년 그리고 2022년 선거까지 총 5차례 출마해 모두 낙선했다. 그런데도 그는 케냐 정치에서 여느 대통령 못지않게 케냐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대외적으로 오딩가는 신식민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범아프리카주의자(Pan-Africanist)로서 아프리카연합(AU) 인프라 개발 고위 대표(2018∼2023)로도 활동했다.

케냐 야당 지도자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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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딩가 전 총리는 1963년 케냐 독립 이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Jaramogi Oginga Odinga)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오깅가는 식민지 지배 시절 형성된 불평등 구조를 정부가 개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대 총리인 조모 케냐타와 결별하면서 권력 핵심에서 배제됐다. 이후 오깅가는 여러 차례 투옥과 정치적 탄압을 겪었다. 이는 곧 오딩가 가문의 정치적 변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딩가는 케냐 서부를 기반으로 한 주요 민족 그룹인 루오(Luo) 공동체의 대표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스스로를 혁명가라 칭하고 이후 제도 개혁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이에 따라 '바바'(스와힐리어로 아버지라는 뜻)라는 대중적 별명을 얻게 됐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은 2010년 케냐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오딩가는 어린 시절을 케냐에서 보낸 후 동독에서 유학했다. 이후 나이로비 대학 강사와 정부 산하 표준청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982년 다니엘 아랍 모이 정권에 맞선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혐의와 반역죄로 기소돼 약 10년간 수감됐다. 이후 오딩가는 반(反)모이 정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한때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1992년 실시한 다당제 선거를 앞두고 부친 오깅가의 지지 유세를 펼치며 다시 정계 전면에 섰다. 비록 야당 분열과 정권의 선거 조작으로 모이가 승리했지만, 이 선거에서 오딩가가 케냐 정치에서 핵심적 존재로 자리 잡는 전환점이 됐다. 1994년 부친 오깅가가 사망하자, 독자 정당을 창당해 자신만의 정치적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97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야권 분열 속에서 다니엘 아랍 모이 대통령이 재차 승리하면서 정권 교체는 무산됐다.

아프리카 케냐 지도

[제작 양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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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가 2002년 대선에 불출마하면서 오딩가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듯했다. 실제로 모이는 한때 오딩가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의 아들 우후루 케냐타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오딩가는 무와이 키바키 지지를 선언했다. 이는 키바키의 승리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계기가 됐다. 오딩가가 키바키를 지지한 것은 강력한 개헌과 정치 개혁을 전제로 한 조건부 연대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키바키 정부는 대통령 권한 대폭 축소를 포함하는 개헌 대신 제한적 수정만을 추진했다. 이에 오딩가는 정부안을 지지하지 않고 2005년 국민투표에서 반대 캠페인을 주도해 개헌안을 부결시키며 정치적 존재감을 다시 드러냈다.

2007년 대선에서 오딩가는 근본적 변화를 기치로 폭넓은 연합을 이끌며 키바키에 맞섰다. 그러나 키바키가 승리자로 선언되자 전국적인 분노가 폭발했다. 이는 케냐 역사상 가장 심각한 정치 위기와 민족 간 충돌, 국가적 탄압 사태로 이어졌다. 폭력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권력 분담 협약이 체결됐다. 오딩가는 국민통합정부에서 총리직(2008∼2013)을 맡았다. 이후 그는 정치 개혁과 헌법 개정에 전념했다. 그는 국가 구조의 분권화를 핵심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2010년 8월 국민투표를 통해 케냐 47개 카운티에 권한을 분산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이 헌법은 사법부와 선거관리기구 등 핵심 제도를 개혁하고 시민의 권리를 확대함으로써 케냐의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정 헌법은 특히 케냐가 좀 더 민주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헌법은 오딩가의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성취로 남아있다.

이러한 진보적 헌법의 제정과 역사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케냐 정치의 기존 권력 논리를 완전히 해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적인 예로 2007년 대선 폭력 사태와 관련, 2011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우후루 케냐타와 윌리엄 루토의 대통령 출마가 각각 아무런 제약 없이 이뤄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딩가는 2017년 대선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대규모 항의를 주도했다.

그러나 2018년 케냐타와의 '악수'(Handshake deal)를 통해 정치적 통합에 기여한 이후 오히려 야당 지지층으로부터 체제 협력에 대한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2022년 대선에서 케냐타가 지지하는 후보로 출마를 선택한 것은 오딩가에게 정치적 손실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2022년 대선 조작 논란이 이어지고, 대규모 청년 시위가 발생한 직후인 2025년 3월 루토 정부의 연정 참여를 선택하면서 민중의 대통령이었던 오딩가는 결국 권력의 편에 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오딩가 전 총리 장례식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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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치적 결단들은 오딩가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판단 받을지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결코 흠결 없는 상징은 아니었다. 그러나 케냐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모이 정권 아래에서 구금과 고문, 키바키 정부의 배신, 2007년 대선 승리 박탈 등 그가 겪은 정치적 시련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조건에서 결정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케냐 정치 체제가 국민의 목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노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박수받을만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오딩가 전 총리 애도를 위해 모인 케냐 군중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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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재로 정치적 공백이 예상된다. 이를 메울 만한 리더를 찾는 과정에서 케냐 정치권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종종 아프리카 정치는 고정적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이 대륙의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진전될 수 있었던 것은, 오딩가처럼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워온 인물들의 헌신 덕분이다.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조준화 박사

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아시아-아프리카센터 선임연구원(창립멤버), 신한대 겸임 교수, 영국 런던대(SOAS) 정치학 박사, 연세대·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 및 강사 역임. 주요 연구 분야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국가 간 외교 관계, 아프리카 개발협력, 아프리카 선거, 분쟁, 이주 난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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