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중국 열병식 참석한 북중러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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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연합뉴스) 정성조 특파원 = 이달 3일 중국의 '항일전쟁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은 중국의 세력권을 세계에, 특히 미국에 보여준 행사기도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른 26개국 정상급 인사는 주로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동유럽에 걸쳐 있었다.
지난 6월 미국으로서는 드물게도 열병식을 개최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열병식에 대해 "나는 그들이 왜 그것을 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보기를 바랐을 것이고, 나는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냉전 이후 북중러 정상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고 중국을 맹주로 하는 '유라시아 블록'이 이들 3국 주위를 감싸는 강렬한 이미지에 세계 각국이 '냉전의 재림'을 우려하고 있을 때 미국 지도자는 그 열병식이 "아름다운 행사"였다며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2기를 시작하고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경쟁 판도는 막간(幕間)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상대 진영을 향해 적극적으로 침투하기보다는 서로의 경계선을 두드려보면서 자기 진지를 다지는 시기. 달리 말하면 서로의 진영을 인정하면서 세계를 분점하는 시기. 중국이 최근 줄기차게 주창하고 있는 '질서 있는 세계 다극화'는 미중 양극화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지난 9일 있었던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과 둥쥔 중국 국방부장 간 화상 통화도 이렇게 읽어볼 수 있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과의 충돌을 추구하지 않고, 정권 교체나 중국의 '질식'을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우선순위 전구(戰區)'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핵심 이익'(vital interest)을 가지고 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이 이익을 단호히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역시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며 대만과 남중국해에 미국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인 작년 5월 싱가포르 '샹그릴라 대화' 당시 미중 국방장관 회담에서 로이드 오스틴 당시 미국 장관이 중국군의 '대만 포위' 훈련을 '도발적인 행동'으로 규정하면서 중국을 압박하고,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보장부터 중국의 러시아 지원,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여 등 현안을 폭넓게 거론한 것과 비교할 때 이번 미중 소통에서 미국의 언급은 간소해졌다.
중국은 이튿날 필리핀과 영유권 분쟁을 벌여온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중국명 황옌다오<黃岩島>)에 '국가급 자연보호구역'을 신설한다고 발표하며 '행동'에 나섰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물러선 만큼 '숨 쉴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주변국들은 처음에는 중국의 일방적 주장이라며 반발하거나 무시하겠지만, 바다 위에 '수산 시설물'이나 인공 섬을 만드는 것처럼 차근차근 물리적·제도적 근거를 만들고 세월을 보내면 유리해지는 것은 중국이라는 점을 중국은 잘 알고 있다. 중국이 자주 이야기하는 '합법적 권익'의 핵심 재료는 '버틸 시간'이다.
떠들썩했던 미중 관세 전쟁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중국은 출혈을 감수하며 버티고 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중국국장을 역임한 라이언 하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센터장은 지난달 계간 '차이나리더십모니터'(CLM) 기고문에서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풍에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며, 중국의 전략을 ▲ 전략적 평정심 유지 ▲ 국제적 고립 방지 ▲ 희토류 등을 동원한 미국 약점 타격 ▲ 시간이 중국의 편임을 믿기 ▲ 협상의 문 열어두기 등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중국 경제에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준비 없이 무역 전쟁을 벌여 값비싼 후퇴를 해야 했다고 짚었다.
중국의 올해 8월까지 무역 실적을 보면 대미 무역액은 14.4% 감소했지만 전 세계 대상 무역 규모는 2.5% 증가했다. 최대 무역 상대국인 미국의 비중을 줄이고 동남아시아와 유럽연합(EU), 일본 등과 무역을 늘렸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대치가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이라면 '시간은 중국 편'임을 믿고 미국이 양보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심산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미중 무역 협상 대표인 리청강 중국 상무부 부부장이 지난달 미국을 방문했을 때 "협상만 할 뿐 양보하지 않는다"(只談不讓)는 입장을 취했다며 "이런 태도는 무역뿐만 아니라 군사·외교로 확대됐을 수 있고, 새로운 중국·미국 경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전문가들도 이제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우신보 상하이 푸단대 미국연구센터 주임은 지난달 '푸단-하버드 중미 청년 지도자 대화' 개막식 연설에서 "트럼프의 첫 임기에서 중국이 한 것은 주로 수동적 반격이었고, 기본적으로 그의 리듬에 맞춰 갔다"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데 기본적으로 중국의 사고방식과 리듬에 따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우 주임은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중국은 실제로 중미 관계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중미 관계를 처리할 열쇠는 점점 더 트럼프가 아닌 중국에 달려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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