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유배·돌·신화로 만나는 제주…제주비엔날레 '변용의 기술'
입력 2026.09.18 05:52수정 2026.09.18 05:52조회수 0댓글0

외부 영향 받아들여 제주 문화로 바꿔온 과정…섞고 모으고 흥으로 풀어내
"현대사회 난제의 해답을 제주의 공존과 변용 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
20개국 69팀 참여…제주도립미술관 등 5개 전시공간서 11월 15일까지


피에르 파브르의 '제주 라바'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도립미술관 앞에 설치된 피에르 파브르 작 '제주 라바'.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도립미술관 앞. 형광색 붉은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파브르의 '제주 라바'(Jeju Lava)다. 그 옛날 바다에서 붉은 불을 내뿜으며 솟아난 화산섬 제주가 탄생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9m 높이의 철제 마스트와 카본 링에 매달린 1천여 개의 형광 리본은 제주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가볍고 유연한 리본은 거대한 자연의 힘을 만나 예상할 수 없는 궤적을 만든다. 작품 아래 수면에는 리본의 움직임과 제주의 하늘이 겹쳐 비친다. 작가가 말하는 '자연의 퍼포먼스'다.

제주도를 찾은 파브르는 "프랑스 쇼베(Chauvet) 동굴에는 3만5천년 전 무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이 그린 것은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이라며 "화산 벽화는 '제주 라바'로 쇼베 동굴은 제주도립미술관으로 연결된다. 예술은 긴 세월을 이어준다"고 말했다.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이 제주도립미술관을 비롯해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예술공간 이아, 제주아트플랫폼, 갤러리레미콘 등 5개 전시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20개국 69팀이 참여하며 오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허끄곡'과 '모닥치곡'은 제주어로 섞고 모은다는 의미다. '이야홍'은 제주의 대표적인 통속민요 이야홍타령의 후렴구에서 유래한 말로 섞이고 어우러져 흥겨운 상태나 제주의 풍광을 뜻한다.

전시의 큰 축은 '유배', '돌문화', '신화'다. 서로 다른 세 주제가 장소별로 펼쳐지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이 놓여 있다. 제주는 외부의 영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새로운 문화로 '변용'시켰는지다.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 전시 전경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 전시 전경.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 추사의 유배, 단절을 새로운 예술로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를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제주를 '유배의 섬'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유배는 단절과 추방의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장소에 놓인 사람이 자신의 근원과 새로운 환경을 다시 발견하는 계기로 확장된다.

그 중심에는 추사 김정희가 있다. 김정희는 제주 대정으로 유배된 뒤, 고립된 시간을 자신의 예술과 사유를 새롭게 다듬는 시간으로 바꾸며 자신만의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리고 말년에 스스로를 '병든 거사'라 칭하며 자신의 작품에 '병거사예'(病居士藝)라는 서명을 남겼다.

비엔날레는 추사의 병거사예를 역경과 질병 속에서도 예술과 학문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수양하고자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우환, 윤형근, 서세옥, 이응노, 이강소, 이건용, 차학경 등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를 다룬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놓았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기법과 표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관계와 수행의 장을 형성한다.

강요배 작 '도새기 통시'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에 전시된 강요배 작 '도새기 통시'.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강요배의 신작 '도새기 통시'는 제주의 전통과 순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주 집집마다 있던, 전통 화장실과 돼지 우리가 결합된 돗통시와 그 안에 있는 돼지를 그렸다. 그림에서도 냄새가 느껴진다.

돼지는 제주의 생활문화와 생존의 조건을 환기하는 존재다. 사람의 배설물을 돼지가 먹고, 돼지의 배설물과 볏짚이 다시 거름이 되는 돗통시는 버려지는 것을 다시 자원으로 돌리는 제주 특유의 순환 구조였다. 사람과 돼지, 농경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이어지는 이 공간에는 제주의 척박한 환경을 견디며 살아온 지혜가 담겨 있다.

이현태의 미디어아트 '어 김없 는것과 어긋나는 (거)'도 만날 수 있다. 여러 소리 장치가 각자의 반복 규칙으로 소리를 낸다. 각각의 장치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서로 다른 주기가 겹치고 어긋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소리의 흐름을 만든다.

강문석 작 '초원'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중정에 설치된 강문석 작 '초원'.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 돌에서 발견한 제주의 시간과 문화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는 '검으나 돌은 구르고 굴러: 돌문화'가 펼쳐진다.

갤러리 중정에 놓인 강문석의 '초원'은 질주하는 말들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말은 지금은 제주의 상징이지만, 제주 입장에선 원나라 군인들이 강제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한 존재다. 하지만 낯선 땅에 들어온 말은 제주의 바람과 초원에 적응하며 자연과 사람의 삶 속에 스며들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제주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의 땅이다. 현무암은 자연환경인 동시에 삶의 기반이었다. 돌담과 올레길, 방사탑과 거석문화는 돌이 제주의 생활 안에서 어떻게 쓰이고 의미를 얻었는지를 보여준다.

오카베 마사오·미나토 치히로 작 '타임 링스'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설치된 오카베 마사오·미나토 치히로 작 '타임 링스'.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오카베 마사오와 미나토 치히로의 '타임 링스'(TIME RINGS)는 프로타주를 활용한 작업이다. 프로타주는 표면 위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요철과 흔적을 종이에 옮겨내는 기법이다.

오카베 마사오는 현대사회의 돌이라 할 수 있는 콘크리트를 문지른다. 콘크리트는 도시를 세우는 재료이지만, 동시에 도시의 시간이 쌓이는 표면이다. 건물과 도로, 개발과 철거의 흔적이 그 안에 남는다.

노진아 작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설치된 노진아 작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는 인공지능(AI) 기반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얼굴에 키메라의 뱀머리와 인류의 진화 표본을 본뜬 조각들이 얽혀 있다.

이 대지의 여신은 AI 프로그램과 연결돼 있어 관람객들의 질문에 답을 준다. 인간과 기계가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함께 진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김상돈 작 '거울속 열쇠들'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 예술공간 이아에 설치된 김상돈의 조형작품 '거울속 열쇠들-4개의 싹'과 '거울속 열쇠들-3무동'.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 신화와 기억, 제주 공동체를 만나다

제주의 신화를 살펴보는 '큰 할망의 배꼽: 신화'는 제주시 원도심 일대 예술공간 이아, 제주아트플랫폼, 갤러리레미콘에서 펼쳐진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보좌하던 관청 이아의 터에 들어선 예술공간 이아, 아카데미극장을 되살린 제주아트플랫폼, 제주 최초의 현대식 호텔이었던 명승호텔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레미콘에서는 장소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예술공간 이아의 작은 광장인 아고라에서는 김상돈의 신작 설치작업 '거울속 열쇠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제주가 겪어온 시련과 고난, 이를 견디고 극복해온 공동체의 힘을 제주의 신화와 역사, 샤머니즘의 흔적을 통해 들여다본다.

아고라의 사방에는 '거울속 열쇠들-4개의 싹'을 이루는 네 여신이 자리했다. 대지와 생명을 관장해온 여러 문화권의 모계신과 제주의 무속적 여성성, 해녀의 이미지를 결합한 존재들이다.

네 여신이 둘러싼 중앙에는 검은 형상의 '거울속 열쇠들-3무동'이 놓였다. 서로를 받치고 결합하는 무동의 형태에 탐라 건국신화의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즉 삼을나의 이미지를 포갠 작품이다. 세 존재가 각각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구조로 서 있는 모습은 경쟁이나 지배가 아닌 협력과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를 나타낸다.

자나 카디로바 작 '퍼포먼스 Ⅵ'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아트플랫폼에 설치된 자나 카디로바 작 '퍼포먼스 Ⅵ'.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제주아트플랫폼에서 만나는 자나 카디로바의 작품은 관람객을 작품으로 만들고, 작품이 관람객이 되는 경험을 안긴다.

카디로바는 제주 내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한 초상화부터 제주 작가들의 작품, 제주 할망들이 직접 그린 그림까지 모아 관객석에 배치했다.

관람객은 무대 위에 올라 수십 명의 얼굴을 마주한다.

전문 작가들의 작품보다 제주 할망들이 그린 그림들이 더 눈에 띈다. 자신의 하반신을 문어로 꾸민 해녀 할머니, 보청기를 뺐더니 귀가 커진다는 인물, 눈이 6개 달렸다는 '타잔 할망' 등 기발한 초상화들이 눈길을 끈다.

이번 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은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은 "문화적 변방으로 여겨지는 제주를 깊이 들여다보는 비엔날레"라며 "전쟁이나 기후변화 등 난제들을 안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제주가 가진 공존과 변용의 문화를 해답으로 찾아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김영화 작 '녹나무'

(제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제주 예술공간 이아에 설치된 김영화 작 '녹나무'. 2026.9.18. laecorp@yna.co.kr

원본프리뷰

laecorp@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좋아요
0
댓글0
이 댓글에 대한 법적 책임은 작성자에게 귀속됩니다.
0/300
한일생활정보 한터
딤채냉장고
한터애드
3・8 インテリア
MAISON DE OAK
디지털 드로잉 수강생 모집
한일여행사
냥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