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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려도 솔 르윗의 작품…'지시문'으로 만들어지는 개념미술
입력 2026.09.08 12:42수정 2026.09.08 12:42조회수 0댓글0

"아이디어는 예술을 만드는 기계"…솔 르윗 개인전 '오픈 스트럭처'
월 드로잉부터 회화·판화 등 45점…아이디어와 규칙의 확장 조명


솔 르윗 작 '월 드로잉 #786A'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전시장에 구현된 솔 르윗의 '월 드로잉 #786A'. 2026.9.8.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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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오늘날 우리는 18세기에 활동했던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한 곡을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의 가치는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악보에 따라 오늘날의 연주자들이 모차르트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솔 르윗(1928∼2007)의 작품도 이와 닮았다. 그는 선과 형태, 색채의 구성 방식 등을 지시문으로 남겼고, 건축가의 설계도나 작곡가의 악보처럼 이 지시문은 다른 사람의 실행을 통해 작품으로 구현된다.

장소의 조건과 실행자의 해석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만, 그 안에는 르윗이 세운 규칙과 아이디어가 작동한다. 전시가 끝나면 지워지는 벽화(월 드로잉)가 르윗 사후에도 계속해서 새롭게 구현될 수 있는 이유다.

APMA 메이커스 월 드로잉 작업 모습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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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열리고 있는 '솔 르윗: 오픈 스트럭처'는 월 드로잉을 비롯해 구조물, 회화, 사진, 판화, 아카이브 등 총 45점을 통해 "작품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되고 협업으로 완성된다"는 르윗의 예술 철학을 보여준다.

전시의 특징은 르윗의 지시문에 따라 완성한 13점의 대형 월 드로잉이다. '솔 르윗 재단' 관계자 7명과 대학 미술 실기 전공자 23명으로 구성된 APMA 메이커스가 참여해 20여일 동안 전시장 벽에 선과 색을 쌓아 올리며 완성했다.

솔 르윗 작 '월 드로잉 #786A'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전시장에 구현된 솔 르윗의 '월 드로잉 #786A'의 지시문. 2026.9.8.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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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드로잉 #786A'는 르윗의 작업 방식을 압축해 보여준다.

검은 벽면에 흰 선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멀리서는 그저 기하학적인 화면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면 방향과 곡률이 다른 두 개의 원호 조합들이 반복되며 리듬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르윗은 사각형의 모서리에서 반대편 모서리로 연결되는 원호와, 변의 중간 지점에서 출발해 반대편 변의 중간 지점으로 이어지는 원호 등 여덟 가지 원호를 기본 단위로 정했다.

그리고 이 원호 중 두 개를 결합해 격자마다 배치하도록 했다. 작품 옆 범례에 적힌 '1/2', '4/6', '6/7' 등의 표기는 가능한 조합이 어떤 순서로 전개되는지를 안내한다. 원호와 조합 규칙은 같지만, 전시장 벽의 크기에 따라 격자의 수와 전체 화면은 달라진다.

'월 드로잉 #784'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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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윗에게 선, 격자, 정육면체, 모듈은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였다. 그는 이 단순한 요소들에 명확한 규칙을 부여하고 조합과 반복, 순열을 통해 가능한 결과를 확장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완결된 형태보다 형태들이 생겨나는 순서와 관계의 구조였다.

'월 드로잉 #784'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전개한 '기울어진 형태' 연작으로 르윗의 규칙과 시스템이 색채, 중첩, 공간감으로 확장된 사례다.

노란 바탕에 두 개의 기울어진 다면체가 벽면에 놓였다. 정육면체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지만, 수직과 수평의 안정된 축에서 비껴나 있어 화면에 움직임을 만든다.

각 면에는 빨강·노랑·파랑·회색의 물감을 천에 적시고 벽에 반복해 두드리는 방식으로 색을 쌓았다.

색은 겹칠수록 새로운 색조와 깊이를 만들고, 기하학적 형태는 단단한 구조를 넘어 감각적인 이미지로 바뀐다.

규칙과 지시문은 그대로 작동하지만 벽의 질감과 빛, 안료의 농도, 실행자의 손길은 화면에 깊이와 미세한 차이를 더한다.

솔 르윗 작 '월 드로잉 #869A'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전시장에 구현된 솔 르윗의 '월 드로잉 #869A'. 2026.9.8.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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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르윗의 화면은 강렬한 색채와 복잡한 곡선, 불규칙한 형태를 품는다.

'월 드로잉 #869A'는 240㎝×240㎝ 구획의 벽 상단에 한 사람이 검은색으로 삐뚤삐뚤한 수평선을 그으며 시작된다. 이어 다른 사람이 빨간색으로 바로 위 선을 최대한 가깝게 따라 그린다. 노란색과 파란색 선이 같은 방식으로 차례로 더해지고,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순서로 반복된다.

가장 위의 검은 선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선은 처음의 검은 선과 전혀 다른 모습에 이른다.

참여자들의 손 움직임과 집중도에서 생기는 미세한 편차가 반복되면서 쌓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반복 속에서 여러 사람의 시간과 행위를 거치며 차이와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협업의 구조가 된다.

솔 르윗 작 'R715'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전시된 솔 르윗의 지도 작품 'R715'. 2026.9.8.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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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직접 남긴 회화와 판화, 사진, 아티스트북, 기록물도 함께 볼 수 있다. 이들 작업은 르윗의 아이디어가 전시장 밖으로 이동하고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읽히는 방식을 보여준다.

'버킹엄 궁전, 하이드 파크 스피커스 코너, 트래펄가 광장, 세인트 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잇는 영역을 지워낸 런던 지도(R715)'는 시판된 런던 지도에서 제목에 적힌 다섯 장소를 잇는 영역을 잘라낸 작품이다. 정보를 제공해야 할 지도의 중심부는 공백이 되고, 남은 도로와 경계는 부재의 윤곽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지도와 사진, 종이를 자르고 접고 찢어 만든 800점 이상의 'R드로잉', 일명 '100달러 드로잉' 가운데 한 점이다.

르윗은 이 연작이 100달러를 넘지 않는 가격에 판매되도록 요청했다. 작품의 제작 방식뿐 아니라 유통과 소유의 방식에도 하나의 규칙을 적용하려 한 시도였다.

물론 지금은 미술 시장에서 100달러의 100배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된다.

작가 솔 르윗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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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윗은 1928년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나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그는 뉴욕으로 이주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일하며 동시대 작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1967년 '개념미술에 관한 단락들'에서 "아이디어는 예술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쓰며 개념미술의 핵심 원리를 제시했다.

유한한 규칙에서 무한한 변주를 끌어낸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의 근간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

전시 전경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전시된 솔 르윗 작 '미완결의 열린 정육면체' 연작들. 2026.9.8.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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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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