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연구소라는 이름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당시 많은 국민이 격려 메시지 보내와"…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
[※ 편집자 주= 장인순 전(前) 원자력연구소장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여섯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로 2000년대 초반 우라늄 농축실험 사건 등을 다뤘습니다. 다음 주 이후에 나가는 여섯번째 기사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이미 송고한 1∼4번째 기사의 요약은 이번 기사 맨 아랫부분에 수록했습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의 성장 스토리와 사진 등이 들어갑니다.]

"남한-북한의 차이"
미국의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가 2023년 10월1일 엑스(옛 트위터)에 올린 한밤중 한반도 위성 사진. 그 위에는 "한 국가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 지70년 뒤의 모습을 확인해보자"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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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내가 원자력연구소장이었던 2000년에 우리 연구소의 한 팀이 우라늄 농축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했고, 사찰 결과 제재 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인들이 우리의 우라늄 농축 실험을 맹비난하는 행태였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이 일본인처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국익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1년 동안 아주 힘들었습니다."
이는 장인순 전(前) 원자력연구소장(86)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는 전의마을도서관에서 지난 1월 24일부터 네 차례 진행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 우라늄 농축이 이슈화된 이후 일부 한국인이 원자력연구소를 맹비난했지만, 상당수 국민은 우리를 격려했다"고 했다.
장 전 소장은 "이에 앞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는 한국 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압력이 있었다"면서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거세게 우리를 압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원자력 기술 세계 1등 국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생산국이 됐다"면서 "북한의 전력 생산량은 한국의 4%에 불과할 정도로 남북한 차이는 크게 벌어졌다"고 했다.

2004년 9월20일 원자력연구소에 들어가는 IAEA 핵 사찰단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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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국의 우라늄 농축에 대한 핵사찰 당시 국민들의 글>
※장인순 박사의 저서 '상상력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내 나라 땅에서 작은 실험 하나 한 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무리가 있다는 게 암울합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신 과학자분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퇴근 후 집에 가서 고2, 중1 그리고 다섯 살 난 늦둥이 아들놈에게 그분들의 연구 정신과 애국정신을 들려줄 작정입니다"
"국가는 죄인 다루듯 모른 척하고 모든 책임을 우리의 보배인 과학자님들에게 전가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옆에 있으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군요. 힘내시고 우리 국민 모두가 당신들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뿌듯한 뉴스였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대한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알린 쾌거였습니다. 원자력연구소 여러분, 깊은 성원을 보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장인순 박사
[윤근영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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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전 소장은 1940년생으로, 전남 남해안 돌산이라는 섬에서 성장했다. 여수중학교와 여수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그는 30년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그는 핵연료 국산화, 한국형 원자로 건설 등에 기여해서 한국 원자력의 대부로 불린다. 1999년부터 6년간은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퇴직 후에는 사비를 들여 세종시 전의면에 전의마을도서관을 건립했다. 그는 이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자력을 알리기 위한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여수 고등학교 시절 장인순 박사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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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인터뷰 5차 기사 질문-답변이다.
-- 인생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가지 삶의 지혜가 있다면.
▲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공부도, 연구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과 끈기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다. 지능지수가 140 이상이면 머리가 좋다고 하는데, 나는 1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연구원 시절, 1년에 책 50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세우기도 했다. 연구하느라 독서할 시간이 없었지만, 나는 명절 때를 활용했다. 추석과 설 연휴 때 아내한테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서 도서관에 갔다. 이동하느라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일 하루에 책 한권씩 읽는다.
-- 주로 무슨 책을 읽나.
▲ 인문학책, 시집 등을 많이 읽는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교 1학년 때 국어 과목은 D 학점을 받을 정도로 인문학을 소홀히 했다. 수학, 과학만 중시했다. 그것이 후회돼서 나이 들어서는 인문학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전의마을도서관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도 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린다. 유대인이 2천여 년 만에 국가를 회복한 것은 언어를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본인은 지금까지 몇 권 정도의 책을 읽었나.
▲ 9천권은 읽었다. 2020년에 발간한 '여든의 서재'는 4천500권 정도를 읽고 쓴 책이다. 물론, 모든 책을 완독하는 것은 아니다. 책 내용 가운데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뛰기도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엉덩이로 하는 것 같아"
장인순 박사가 전의마을도서관에 붙여 놓은 글
[윤근영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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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사람들에게 독서를 많이 권한다고 하는데.
▲ 나는 전의마을도서관에 찾아오는 여성들한테 명품 가방을 만들어주곤 한다. 그건 여성들이 들고 온 가방에 책 한권씩 넣어주는 것이다. 책이 들어 있는 가방이 5천만원짜리 명품 가방이다. 원자력 원로 7명의 독서 모임도 하는데, 책을 읽고 매주 화요일 만나서 토론한다. 이렇게 한지 10년 이상 됐다. 토론 내용은 원자력 분야가 아니다. 주로 인문학 쪽이다.
-- 본인은 메모를 많이 한다고 했는데.
▲ 세상에서 가장 많은 메모를 남긴 사람은 이탈리아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그의 메모는 9천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많은 메모를 갖고 있던 사람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다. 3천500페이지 정도라고 한다. 현재 내 메모는 900페이지인데. 나는 이런 메모를 재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 전의마을도서관에 오는 아이들한테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단어가 무엇인지 묻곤 한다. 그 답은 '왜?'라는 단어다.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세계를 리드한다. 아인슈타인도 왜? 라는 질문으로 상상력을 키워서 결국 원자력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다.

아인슈타인 박사
[SNS 캡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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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력은 무엇인가.
▲ 원자력이라는 에너지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생기는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핵이 융합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다. 현재의 원자력 발전소는 핵분열을 일으켜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때 나오는 열로 물을 끓여서 터빈을 돌리면 전기가 만들어진다. 태양 에너지는 핵융합으로 생긴다. 따라서 햇빛도 넓은 의미로 원자력 에너지에 속한다.
-- 핵분열하면 왜 에너지가 생기나.
▲ E = mc²이라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이 있다. E는 에너지이고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를 뜻한다. 원자핵이 분열해서 질량 결손이 생기면 줄어든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방출된다. 즉 분열된 두 원자핵 질량의 합이 원래 원자핵 질량보다 줄어들면 그 결손 질량이 에너지다.
-- 원자핵은 어떻게 분열하나.
▲ 원자핵의 밀도는 철의 1조배나 된다. 그러니 물리적 힘으로는 깰 수가 없다. 방법은 중성자를 쏘는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도 안 되고 느려서도 안 된다. 너무 빠르면 튕겨 나가고, 너무 느리면 원자핵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정한 속도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감속재를 쓴다. 중성자가 감속재를 통과하도록 해서 속도를 늦추는 방식이다. 감속재로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는 경수로, 중수를 쓰면 중수로, 흑연을 사용하면 흑연수로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했던 곳이 원자력연구소다.

2004년 1월 30일 오명 과학기술처 장관(왼쪽)과 김진표 부총리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과학기술처 업무보고에서 오명 장관과 김진표 부총리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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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태 직후인 1980년 원자력연구소가 폐쇄될 뻔했다고 하던데.
▲ 박정희 대통령 타계 이후 원자력연구소를 없애라는 국내외의 압력이 강했다. 그런데 당시 신군부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오명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여수로 피난 와서 중학교 1학년과 2학년을 나와 같이 공부했던 친구다. 오명은 국보위에서 연구소를 없애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연구소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 당시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들도 한국원자력연구소 해체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적지 않은 한국인들도 그런 요구를 했다. 이런 국내외 압력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 나는 이걸 '창씨 개명'이라고 한다. 치욕적이고 참담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자력연구소라는 간판을 내릴 때 거기에 있었던 연구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상상해봐라. 독립 국가가 원하는 연구소 이름 하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 한국원자력연구소라는 이름은 언제 되찾았나.
▲ 1989년 핵연료주식회사 준공식 때 나는 당시 본부장(원자력연구소 본부장도 겸직)으로서 강영훈 총리와 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이때 연구소의 원래 이름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강 총리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고,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10년 만에 원자력연구소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2004년 우라늄 농축사태로 한국원자력연구소 방문한IAEA 핵 사찰단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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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초반 우라늄 농축 사건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 2000년에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이 핵발전에 중요한 지르코늄(Zr) 농축실험을 했다. 연구팀은 이 물질 농축에 성공했는데,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실험장비를 해체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구원들로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팀장은 그 설비로 우라늄 농축실험을 해보자고 했고, 연구소장인 나는 이를 승인했다.
-- 우라늄 농축에 성공한 것인가.
▲ 농축도 0.72% 정도인 우라늄을 11%, 33%, 70%로 세 번 농축하는 데 성공했다. 양은 0.2g밖에 안 됐지만 원심 분리기가 아닌 레이저를 이용한 첨단 농축이었다.
-- 왜 90% 이상으로 농축하지 않았나.
▲ 농축 방법을 알았으니 더 진행할 필요성은 없었다. 70%에서 9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핵무기에는 90% 이상 농축된 우라늄을 사용한다.
-- 그 농축실험이 왜 문제가 됐나.
▲ 새로운 IAEA 추가 의정서에 따라 우리 연구소가 실험한 것도 보고 대상에 들어갔다. 규정이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IAEA에 보고했더니 1주일 만에 사찰하러 왔다. 보통 3개월 후에 방문하는데, 우리한테는 곧바로 왔다. 6∼7명이 3∼4차례 와서 샘플링을 했다. 그들은 그걸 가져가서 분석했는데, 우리가 보고한 것과 일치했다.

2004년 당시 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소장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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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AEA는 왜 그렇게 빨리 움직였나.
▲ 당시 IAEA 사무총장이었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한국 농축실험을 자기 연임의 기회로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 사람이다. 그때 미국은 이 사람의 사무총장 연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엘바라데이는 한국의 농축실험을 이슈화하고, 빠르게 대응해서 연임을 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연임에 성공했다.
-- 그 사찰 이후 어떻게 됐나.
▲ 당시 한국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제여론이 있었다. 세계 언론사들도 시비를 걸었다. 특히 일본 기자들은 직접 나한테 찾아와서 한국 정부가 시켰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나는 연구자들이 과학적 호기심으로 실험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우라늄 농축은 원자력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꿈이었다. 사찰 결과 처벌은 없었다. 우리는 자진 신고를 했고. 정직하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 당시 한국인들도 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농축 실험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 일부 한국 언론 등도 누가 시켰느냐, 정부가 시킨 것이 아니냐면서 문제 삼았다. 그들에게는 국익이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수많은 일반 국민이 우리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시 나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오명 과학기술처 장관은 수리하지 않았다.

북한, 회양군민발전소 준공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25년 11월 21일 보도에서 "강원도 회양군민발전소 준공식이 20일에 진행됐다"고 했다. 이 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준공식에 참석해 연설했다"고 전했다.
[조선중앙통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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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전력 생산국이 됐는데, 현재 한국과 북한의 전력 생산량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 해방 후 북한은 한국보다 경제 여건이 좋았다. 발전소가 모두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발전량은 한국의 4.4%에 불과하다. 북한은 하루에 1∼2시간밖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한다. 기차도 출력이 약해서 높은 곳에는 잘 올라가지 못한다
-- 본인은 북한에 가본 적이 있나.
▲ 1995년부터 시작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경수로 건설 사업 때문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속초에서 배를 타고 함경남도 신포항에 도착한 뒤 KEDO에 갔다. 신포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차창 밖의 모습을 봤는데, 가슴이 매우 아팠다. 집 창문에는 유리가 하나도 없었다. 거의 모두가 비닐로 돼 있었다. 한국의 1960년대 모습이었다. 그때 다시는 북한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 평양에 갈 기회도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쌍하게 사는 우리 동족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한-베트남, 원전 금융 협력
황기연 한국수출입은행 은행장과 레 응옥 썬 베트남국가산업에너지공사(PVN) 회장이 2026년 4월 22일 하노이 주석궁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또 럼 공산당 서기장 겸 국가주석이 임석한 가운데 원전 프로젝트금융 협력 가능성 검토 양해각서(MOU) 교환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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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한 국내총생산(GDP) 차이도 60∼70배로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과거에는 한국도 굶주렸다. 나도 어렸을 때 항상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니 배가 고파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쉬지 않고 일했다. 그게 북한과 다른 점이다. 나는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 자유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과거 동독도 아무런 예고 없이 무너졌다.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 정도 돼서 동베를린에 들어간 적이 있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비교하면 천국과 지옥이었다. 똑같은 독일 국민인데, 어떻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체코에도 갔는데, 그 나라의 현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나라 국민이 얼마나 우수한 민족이었나. 헝가리,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모두 우수한 민족이었지만 공산주의를 하다 보니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다.
(인터뷰 5차 기사 끝)

원전 산업 수출상담회
2026년 4월 22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개막한 '2026 부산국제원자력산업전'에서 수출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24일까지 열린 이번 행사에는 19개국의 전력, 원자력 관련 기업 130곳이 참가해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세계 원전 시장의 최신 기술을 소개했다. 한국원자력연차대회와 제25차 태평양연안국 원자력회의도 동시에 개최됐다.
[강선배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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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미국은 한국없이 원전 못짓지만…한국은 미국없이 짓는다"(2월5일)
한국의 원전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시공, 원자로 설계, 운전 능력 등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밤새워 실험하고 개발했다.
미국은 전력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원전 수백기를 추가로 지을 계획인데, 한국의 도움 없이는 지을 수 없다. 유럽 각국도 원전을 건설할 예정이어서 한국 원전 수출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전기 생산에서 원자력의 비중은 30% 정도인데, 50%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전기 요금이 떨어져서 서민들의 가계 부담이 줄어들고, 조선업을 비롯한 기업들은 비용 절감으로 수출경쟁력이 한층 더 올라간다.
원전의 안전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은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가동을 시작한 이후 많은 원전을 운영해왔지만,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다.
< 2차 기사 요약>
[삶] "핵무기 제조는 휴대폰보다 훨씬 쉽다"…원자력 대부 장인순(2월24일)
핵무기 제조 기술은 하이테크가 아니다. 80년이나 된 과거의 기술이다.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원자로 제조보다 쉬운 일이다. 원자로에 100만개의 부품이 들어가지만, 핵무기에는 2천개도 안 들어간다.
한국이 핵무기 제조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와의 약속 때문이다. 이것이 북한과 다른 점이다. 우리는 핵무기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다.
현재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중동, 동남아 국가 등 세계 각국이 원자력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원전 기술을 발전시켜온 덕분에 세계 원전 1등 국가가 됐다.
한국이 국제사회와의 약속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는 않지만, 군사 강국들이 많은 동북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핵무기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원전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것이 그 잠재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3차 기사 요약>
[삶] "한국, 핵추진 잠수함 홀로 충분히 만든다…북한은 기술 없어"(3월7일)
핵 추진 잠수함은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바닷속에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국의 해안선 근처까지 몰래 가서 근접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니 적군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
국가는 당연히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을 갖춰야 한다. 그 차원에서도 원자력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원자력 발전에 가장 기여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분은 1971년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공사를 시작했다. 건설비는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4차 기사 요약>
[삶] "北핵엔 한마디 안하면서 원자력연구소장 책상위 걸터앉아 고성"(2026년 3월27일)
반핵단체들은 원자력발전을 위해 밤새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반국가적 행위, 반민족 행위를 한다면서 시위했다. 내가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일할 때는 20여명이 소장실에 몰려와서는 내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내 의자에 앉아서는 빙빙 돌기도 했다. 고함을 지르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한국에서 반핵을 외치면서 북한 핵무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핵탄두 장착 가능 미사일을 발사해도 침묵했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에게 묻고 싶다.
원자력 연구자들은 많은 수모를 당하고도 눈물겨운 노력을 한 끝에 원자력 기술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이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와 국방력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
keunyoung@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