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뿌리 '경기전'에서 시작하는 걷기 여행
(전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조선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경기전.
그 옆으로 들어선 한옥들 사이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소중한 것들을 알아보고, 지키고, 가꾸는 전주 사람들의 남다른 안목과 정성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경기전 돌담길을 걷는 여행자[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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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스타일' 집약된 전주한옥마을 거리
전주한옥마을의 주도로인 태조로는 주중인데도 한겨울 맹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다양한 옷차림과 생김새에다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도 적잖았다.
골목길을 누비는 그들의 한복 자락 끝에 나들이의 여유와 기쁨이 율동하고 있었다.
근래 외국인이 내국인보다 더 눈에 띌 정도로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늘고 있다.
K팝 영향, 원-달러 환율 상승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커진 것이 그 배경이리라.
한옥마을 방문객이 1천만명을 넘은 지 오래다.

전주한옥마을 전경[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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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등 외국 언론이 전주를 동아시아에서 꼭 가봐야 할 문화도시 등으로 선정한 사례도 한두 번이 아니다.
기와지붕의 용마루가 겹치고 이어져 만들어내는 선, 담장의 결을 보고 한국 전통 주거 문화를 실감하는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한복, 한식, 한지, 한소리, 한복, 한방 등 '한(韓) 스타일'이 집약된 전주다.
한국의 행정 수도가 서울이지만, 전통문화 수도로 전주가 꼽히는 이유이다. 한옥마을은 그런 전주를 대표한다.
마을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전시물이 아닌, 누군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한옥을 접하게 되고 길을 수놓은 역사, 문화, 미식을 즐기게 된다.
경기전∼정동 성당∼오목대∼전주향교∼전주천변∼최명희문학관∼승광재∼풍남문 등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빠른 걸음이라면 1∼2시간에 걸을 수도 있겠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하루해가 짧다.
◇ 조선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경기전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

경기전 전경[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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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여행의 출발점은 '경사스러운 터에 세워진 임금의 집'인 경기전이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시조가 태어난 곳, 즉 그의 본관이다. 조선은 이곳에 경기전을 짓고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은 임금의 초상화다. 제사를 지낼 때 영정으로 쓰이며, 그림 속 인물 그 자체로 간주되기도 한다.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어진을 남겼다. 그러나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개 없어지거나 불에 탔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국왕 27명 중 진정한 의미의 어진이 남아 있는 임금은 태조, 영조, 철종 등 세 명뿐이다.
이 중에서도 1410년(태종 10년)에 그려져 6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태조 어진은 특별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태조 어진은 내장산, 묘향산, 강화도 등으로 옮겨진다. 오늘날 태조 어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전화 속에서 어진이 성공적으로 '피신'한 덕분이다.
조선 시대 어진은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또 화폭 속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어진 속 이성계는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한 채 의자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가 그려져 있고, 수염은 잡아당기면 '아야' 소리가 날 듯이 세밀하게 한 올 한 올 묘사돼 있다.
어진의 품위를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는 태조 어진은 한국 초상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태조 어진[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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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은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경기전 정전에 걸린 어진은 한국 인물화의 대가 권오창 화백이 2011년 이모한 것이다.
이모란 보존을 위해 원본의 미적, 역사적 가치를 그대로 살려 옮겨 그린 것을 말한다.
전란 속에서 보존된 것은 태조 어진만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도 같이 살아남았다. 전주사고본도 어진과 함께 '피난'했기 때문이다.
실록은 국왕의 정사를 가감 없이 남겨 후세가 바른 정치를 펴는 데 참고하도록 한 기록이다. 서울, 전주, 충주, 성주 등 4대 사고에 보관돼 있던 실록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빼고 모두 불탔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실록을 다시 제작해 태백산, 오대산 등에 새로 지은 5대 사고에 봉안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조선왕조 600년의 통치 기록이 전해질 수 있었던 드라마이다.
다시 말해 전주사고본마저 유실됐더라면 조선왕조실록은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진 것은 이를 지켜낸 선조들의 피와 땀, 지혜와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화에 불탔던 전주사고 실록각은 원래 자리인 경기전 안에 복원돼 있다.
실록각과 어진박물관은 정전 마당을 나와 조금 걸어가면 나온다.
태조 어진과 실록은 모두 국보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조선왕조실록만큼 국왕의 통치 기록을 엄정하고 체계적으로 남긴 사례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배경이다.

경기전 내 실록각[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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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 동, 8만여 평에 펼쳐진 700여 채의 한옥 군락
일제에 맞선 저항정신에서 시작돼
마을의 큰 도로인 태조로와 경기전로를 건너 골목 안으로 접어들면 풍남동·교동·전동 등 3개 동, 8만여 평에 들어선 한옥 700여 채가 펼쳐진다.
이 한옥들은 옛날 양반들이 살던 집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주거지로 쓰이고 있는 근대 주택들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호남 곡창지대의 중심인 전주에는 일본인들이 이주해 전주부성의 서쪽 성문 밖에 집단 거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이 성을 허무는 등 한국문화를 말살하려 하자 전주 사람들은 경기전 쪽에 한옥을 무리로 지어 대항했다.
전주한옥마을은 이렇듯 일제에 맞선 저항정신에서 비롯됐다.
한옥마을에는 오목대, 전주향교, 최초의 천주교 순교 터에 세워진 전동성당 등 중요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경기전과 오목대[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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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 모양으로 난 골목길, 혹은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을 마음 가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발길은 유적지와 문화재에 닿아 있다.
오목대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던 길에 축하연을 벌인 곳이다.
오목대를 내려오면 길은 전주향교로 이어진다.
전주향교는 1354년(공민왕 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이다.
지방 곳곳에 남아 있는 향교 중 전주향교는 보기 드물게 크고 넓다.
뜰에는 약 400년 된 은행나무들이 서 있었다. 곰팡이, 해충이 꼬이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바른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심긴 나무들이다.
◇ 아름다운 '3대 성당'…전동성당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경기전을 바라보는 전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 터에 세워진 성전이다.
서울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통한다.
신해박해 때인 1791년 12월8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가 이곳에서 참수됐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F.X. 보두네 신부가 1888년 전주본당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교우들이 모은 기금에다 사재를 보태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 성당 건축이 시작됐다.

전동 성당[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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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전주부성 성곽 돌이 주춧돌로 사용됐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스며든 돌들을 신자들이 간직했다가 주춧돌에 포함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전동성당은 호남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성당 전체는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정면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비잔틴 양식이다.
◇ 한옥마을에 가봐야 할 갖가지 이유들
한옥마을을 찾는 사연은 다양하다.
이름난 맛집과 유행 따라 새로 등장하는 길거리 간식을 즐기거나 미술·공예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방문한다.
전주부성의 남쪽 문이었던 풍남문 바깥쪽에는 한때 전국 3대 시장으로 유명했던 남부시장이 있다.
한옥마을 안팎과 남부시장에는 한정식, 전주비빔밥, 피순대국밥, 콩나물국밥 등 미식 도시 전주의 간판 음식점들이 몰려 있다.

풍남문과 그 주변[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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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시장은 경기전에서 5∼10분 걸어가면 닿는다.
한옥마을 골목 골목에 촘촘하게 들어선 작은 박물관, 전시관, 미술관, 문학관, 도서관, 공방 등 20여 개의 문화시설은 여행자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주부채문화관은 곧고 단단한 대나무가 많았고 한지의 고장이었던 전주에서 어떻게 부채가 발달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전주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과 장인 정신이 결합해 태어난 부채는 임금에게 진상됐다. 전라감영에는 부채 제작 감독 관청인 선자청이 설치돼 있었다.
갤러리, 회의공간,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스 등으로 구성된 교동 아트 스튜디오는 BYC의 옛 상표인 백양메리야스의 공장 터에 자리 잡고 있다.
1960년대 건축된 편직 공장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시관과 스튜디오로 리모델링돼 있어 옛 공장에 서린 추억과 정취가 묻어난다.
약 2천500평에 달했던 백양메리야스 공장 터에는 최명희문학관도 들어서 있다.

전라감영 돌담[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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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에 박경리가 있다면 전북에는 최명희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역작 '혼불'에는 전북 지방 사투리, 세시풍속, 생활 문화가 진하게 녹아 있다.
문학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흥선 대원군의 증손자이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직계 손자로, 마지막 황손인 이석 선생이 머물고 있는 승광재가 있다.
선생은 이곳에서 황실 전통, 문화, 역사를 강연하고 있다.
한옥마을 옆으로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걸으면 고즈넉한 풍광이 여행자의 노독을 풀어주는 듯하다. 남천교 위에 지어진 청연루는 여행자들이 앉거나 누워서 쉬어갈 수 있는 운치 있는 전통 누각이다.
김경심 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한옥마을을 골목골목 거닐다 보면 집들 전체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며 옛 마을이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전주천과 청연루[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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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