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스파시바…조국 땅에 묻힐 수 있게 해 준 정부에 감사합니다"
입력 2025.12.19 02:07수정 2025.12.19 02:07조회수 0댓글0

광복 80주년 맞아 영주귀국한 고려인 1세 도주복 할머니
모국 땅 밟자 "이제 숨을 좀 쉴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고려인 1세 도주복 할머니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8일 저녁 경기 안산 임시 거처에 도착한 고려인 1세 도주복 할머니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양손 엄지척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2025.12.18.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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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스파시바(Спасибо·감사합니다). 스파시바…. 조국 땅에 묻힐 수 있도록 해 준 한국 정부에 감사합니다."

18일 강원도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 24시간의 바닷길 끝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입국장에 들어선 도주복(94) 할머니는 연합뉴스와 만나 연신 러시아어로 감사를 전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이주로 사할린 땅에 내몰린 지 87년 만에 할머니는 다시 '모국' 땅을 밟았다.

이날 영주 귀국길에는 딸 리기보기(71) 씨도 동행했다. 입국 직후 할머니는 깊은 숨을 내쉬며 "이제 숨을 좀 쉴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는 고된 항해와 긴 생애의 무게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살았어. 자식들에게 짐만 되고…"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배에서 내려 입국장 향하는 도주복 할머니

(동해=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8일 오후 강원도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 도주복(앞줄 왼쪽) 할머니가 휠체어에 탄 채 김경협(뒷줄 오른쪽)재외동포청장과 허정구(뒷줄 오른쪽서 2번째) 대한적십자사 사할린동포지원본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입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맨 왼쪽은 도 할머니와 함께 영주귀국한 딸 리기보기(71) 씨. 2025. 12.18.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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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머니는 1932년 북한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7세였던 1938년, 부모의 손을 잡고 사할린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남편은 1928년생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으로 사할린 탄광과 벌목 현장에서 평생을 보냈다. 남편은 1995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할머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할머니의 삶은 언어와 국경을 넘나들었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썼지만, 밖에서는 러시아어가 필요했고, 일본인 밑에서 살던 시절 일본어도 익혔다. 할머니는 "러시아어를 완전히 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 없다"며 "힘들었지만, 러시아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어"라고 담담히 말했다.

가족사는 또 다른 이산의 역사다. 여동생(85)은 먼저 영주귀국해 경기 남양주에 살고 있고, 남동생도 귀국했지만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과는 같은 모국 땅에 살지만, 서로 고령이어서 자주 만나기도 쉽지 않다.

환영 속 입국장서 나오는 도주복 할머니

(동해=연합뉴스) 영주 귀국한 도주복(앞줄 왼쪽) 할머니가 대한적십자사 자원봉사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국장을 나오고 있다. 뒷줄 오른쪽은 김경협 재외동포청장. [재외동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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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머니는 2남 3녀에, 손주 11명, 증손주 13명 등 모두 29명의 후손을 둔 대가족의 어른이다. "한 트럭"이라는 말로 가족을 설명할 만큼, 삶의 버팀목은 늘 가족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두 명의 조카와 손녀 등 모두 6명의 가족이 살고 있다. 조카 둘은 한국 남성과 결혼해 서울에 정착했고, 큰 조카는 2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아 아들이 군 복무를 마쳤을 정도다.

그의 이번 귀국은 사실 처음은 아니다. 2010년 한 차례 영주 귀국했지만, 혼자 오는 바람에 외로움과 생활의 불편 등으로 적응하지 못해 바로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른바 '역 귀국자'인 셈이다. 이번에도 러시아에 남은 가족들은 "고령인데 왜 또 가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딸, 손녀와 함께 살 수 있게 된 점이 결국 할머니의 발길을 고국으로 돌리게 했다.

환영식서 포즈 취한 도주복 할머니

(동해=연합뉴스) 도주복(왼쪽서 3번째) 할머니가 환영식에 앞서 김경협(왼쪽서 첫 번째) 재외동포청장과 허정구(왼쪽서 4번째) 대한적십자사 사할린동포지원본부장과 함께 손가락 하트를 하고 있다. [재외동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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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도 그때와 달라졌다. 자신을 돌볼 딸이 함께 왔고, 남양주에 사는 여동생, 한국에 뿌리내려 서울에 사는 조카들, 손녀들이 있다.

지난해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영주귀국 지원 대상이 자녀까지 확대되면서 가족 동반 정착의 문도 넓어진 덕분이다.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정책이 보다 현실적으로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도 할머니는 2022년 6월 한국에 먼저 들어와 안산 고향마을 인근에 살고 있는 손녀의 원룸에서 임시로 머물기로 했다. 보금자리로 배정받은 인천 집에 아직 살림살이가 갖춰지지 않아 마련되는 대로 이주할 예정이다.

안산 손녀집서 손녀들과 함께 한 도주복 할머니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18일 저녁 경기 안산 임시 거처에 도착한 도주복 할머니가 손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 12.18.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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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거주지로 사할린동포 750명이 모여 사는 안산 고향마을을 신청했지만, 빈집이 없는 데다 대기자가 많아 차선책으로 인천을 선택했다. 서울에 사는 조카들과 20분 거리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향후 여건이 되면 안산 고향마을로의 이주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고령이지만 건강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장시간 항해로 입국 당일 점심은 거의 들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동해에서 안산까지 버스로 4시간에 걸쳐 이동해 허기진 데다 손녀들을 만나자 저녁 식사는 육개장에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할머니는 "밥을 먹어야 산다"며 환하게 웃었다.

환송하는 도주복 할머니 러시아 가족들

지난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여객터미널에서 환송하는 도주복 할머니 자녀들과 손주들. [리기복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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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머니의 귀환은 한 개인의 이주를 넘어, 일제강점기와 분단이 남긴 상처가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고국에서 보내게 된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은 세대가 가장 고생했다"는 말을 남기며,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산증인으로 서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할머니는 다시 한번 짧게 말했다.

"스파시바."

그 감사 인사에는,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된 감격과 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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