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의 크루즈' 코스타 세레나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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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연합뉴스) 정동헌 기자 = 꿈꿔온 일탈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졌다. 부산항을 떠나 홋카이도 하코다테와 오타루로 향하는 6박 7일의 여정. 모두투어 크루즈선 코스타 세레나호에 몸을 실었다.
거대한 배가 육중한 몸을 밀어 항구를 벗어나자, 세상은 오직 바다와 하늘, 그 경계 없는 두 빛깔만 남았다. 얼마쯤 나아갔을까, 하늘이 흐려지더니 이내 빗줄기가 흩뿌렸다.
그래도 좋았다. 아니 그래서 더 좋았다. 흐린 하늘조차 이 여정의 한 페이지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멈춰 있던 삶을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 그것은 묵혀둔 꿈과 호기심이었다.
◇ 크루즈에 몸을 싣다. 부산에서 홋카이도까지

베스타 정찬식당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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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선 코스타 세레나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완벽한 목적지다.
품격 있는 정찬과 화려한 공연을 만끽하는 순간, 바다 위 특급호텔이 선사하는 환상적인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솔레미오, 사우나와 뷰티케어 전용공간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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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정박한 '코스타 세레나호'의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11만 4천500t급, 290m로 여의도 63빌딩(249m)보다도 길다. 정원은 3천600명이며 객실만 1천500개에 이른다. 낯섦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들어선 선내는 기대 이상으로 고급스러웠다.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 크루즈의 세레나호는 복도와 엘리베이터 곳곳을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과 영웅들로 장식하여 '신들의 집'이라는 별칭을 실감 나게 했다. 이윽고 거대한 뱃고동이 울리자, 부산항의 불빛이 물결 위에서 길게 흔들리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크루즈 비상 대피 훈련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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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할 때 발급받은 '코스타 카드'는 선내 생활의 중심이 되는 만능 카드다. 선실 문을 여닫는 열쇠 역할은 물론, 현금이 통용되지 않는 선내에서 개인 신용카드와 연동되어 유료 레스토랑 등의 결제 수단이 된다. 기항지에 내리고 다시 배에 탈 때는 신분증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다.
객실에 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렸다. 크루즈의 첫 공식 일정인 비상 대피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지정된 대피소에서 코스타 카드를 태그 해야만 다음 일정을 이어갈 수 있다. 요령을 피우다 불참하면 이후 선내 활동이 제한되므로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god 김태우의 선상페스티벌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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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축제
출항 다음 날 '지오베 대극장'에서 그룹 god의 보컬리스트 김태우의 공연이 열렸다. 붉은빛 인테리어와 화려한 조명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곳은 매일 밤 새로운 쇼가 펼쳐지는 축제의 장이다. 1천350석의 객석은 물론 3층 통로 계단까지 관객들이 가득 들어찼고, 공연 내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또 다른 라이브 쇼 '사포리 디딸리아' 역시 이탈리아 정상급 가수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칸초네와 오페라 아리아, 귀에 익은 팝송을 넘나드는 무대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라이브쇼 사포리 디딸리아(이탈리아의 맛)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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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판테온 아트리움에 울려 퍼진 라운지 피아니스트의 감미로운 연주와 노래는 크루즈 특유의 여유로운 밤 분위기에 흠뻑 취하게 했다. 칵테일 한잔을 곁들이며 낭만적인 선율에 귀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깊어 갔다. 그렇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이 쌓여갔다.
매일 저녁 배달되는 선상 신문에는 다음날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돼 있다. 선내 어딘가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라이브콘서트, 밴드공연 등이 펼쳐졌다. 그리고 인문·문화 분야 명사들의 강연 프로그램은 바다 위에서 만나는 특별한 배움의 시간을 갖게 했다. 정찬식당 세레스와 베스타, 자유로운 뷔페식당을 비롯해 카지노, 수영장, 헬스장, 면세점 등 다채로운 부대시설이 크루즈 여정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 별을 품은 도시 하코다테

하코다테 노면전차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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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창틀이 흔들릴 때마다, 노면전차는 딸랑거리는 다정한 종소리를 울리며 도로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그 종소리를 따라 고료카쿠와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로 향했다. 크루즈 여행의 첫 기항지, 분명 처음 딛는 땅인데도 그 덜컹거림마저 낯설지 않았다. 오래 떠나 있다 다시 돌아온 고향처럼, 하코다테는 나지막한 위로로 다가왔다. 화려함 대신 온기로, 속도 대신 온도로 오래도록 기억될 도시.

고료카쿠 타워전망대에서 바라본 별모양의 공원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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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료카쿠의 별 모양 요새
항해 40시간 만에 마침내 홋카이도 하코다테 항구에 닻을 내렸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고료카쿠(五稜郭) 공원이다. 전망대 타워에 올라 내려다본 고료카쿠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땅에 박혀 있는 듯했다. 적의 공격에 사각지대를 없애고자 오각형의 돌출부마다 포대를 설치한, 방어에 완벽한 별 모양의 요새였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 함대를 이끌고 내항해 개항을 압박하자, 에도 막부가 외세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설계한 요새다. 그러나 고료카쿠는 역설적이게도 구막부군과 신정부군이 격돌한 '보신 전쟁'의 최후 무대가 되었고, 사무라이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비극의 현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마지막 사무라이 히지카타 도시조 동상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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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07m의 전망대에는 고독한 결의를 품은 한 사무라이의 동상이 서 있다. 막부 말기 무사 집단 신선조(新選組)의 '귀신 부장'으로 불리던 히지카타 도시조다. 시대에 저항하며 신념을 지킨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그려낸 사무라이의 마지막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 여운을 되새기며 고료카쿠 공원을 나서는 길, 마치 그날의 기억을 품은 듯 아스라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 거리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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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창고에 새겨진 하코다테의 어제와 오늘
하코다테는 요코하마, 나가사키와 함께 일본 최초의 개항장으로 번성했던 항구 도시다. 밀려드는 무역품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목조 창고는 화재로 소실되는 시련을 겪었고, 이후 화마를 견뎌낼 붉은 벽돌로 다시 세워졌다. 물류창고들은 세월이 흘러 낭만적인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는 이제 사진첩의 한 장을 장식하는 예쁜 배경을 넘어, 하코다테가 지나온 일본 근대화와 국제 무역의 황금기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하코다테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를 찾는다면 단연 '럭키 피에로'를 가야 한다. 오직 하코다테 지역 안에서만 매장을 운영하는 독특한 지역 밀착형 브랜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지러울 정도로 이색적인 인테리어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부동의 1위 '차이니즈 치킨버거'의 맛은 강렬했다. 새콤달콤하고 짭조름한 중화풍 간장 소스와 바삭한 패티의 만남은 단짠의 정석 그 자체. 이 버거를 먹기 위해 하코다테를 다시 찾고 싶다는 여행객들의 말이 절로 이해됐다.

하치만자카 언덕에서 인증샷을 찍는 여행객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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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가 건네는 다정한 인사
하치만자카 언덕 위에 서면 바다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길의 끝, 항구에는 부산에서 타고 온 코스타 세레나호가 정박해 있었다. 한 걸음씩 내려서며 바라보는 풍경은 어딘가 그리움을 닮아 있었다. 곧게 뻗은 길과 그 끝의 바다, 정박한 배 한 척. 이 단순한 구도가 왜 이토록 마음을 붙잡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떠남의 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돌아옴의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바람이 언덕을 타고 올라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오래도록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낯선 도시의 언덕에서 문득 익숙한 감정 하나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마음을 품고 걸어가는 길목에서 모토마치를 만났다. 일본 최초의 개항 도시가 품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언덕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이국적인 정취로 여행의 낭만을 더했다. 언덕길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서양식 건축물과 일본 전통 가옥의 조화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언덕 위 눈길을 사로잡는 구 하코다테 공회당은 1910년에 지어진 콜로니얼 양식의 목조 건축물이자 일본 중요문화재다. 건물 외벽의 블루그레이와 황금색이 이루는 조화가 세련되면서도 강렬한 멋을 풍겼다.

구 하코다테 공회당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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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현관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은은한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선율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2층 대연회장. 그곳에서는 마침 하코다테 글로리아 합창단이 바흐의 칸타타를 부르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발코니에 서서 한눈에 들어오는 하코다테 항구를 바라보았다. 울려 퍼지는 합창은 비바람을 뚫고 이곳에 당도한 크루즈 여행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하코다테가 건네는 가장 다정한 환영 인사였다.

짙은 안개 속 하코다테 로프웨이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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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뚫고 만난 하코다테의 보석
하코다테의 밤 풍경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로프웨이 승차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빗줄기는 다시 굵어졌고, 산 정상의 전망대는 이미 짙은 비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보석 상자를 열어보는 듯하다는 하코다테의 밤이건만 눈앞에 가로놓인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안개뿐이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기어이 로프웨이에 몸을 싣고 산 정상에 올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태풍에 가까운 비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우산은 순식간에 뒤집혔고 카메라 렌즈에는 차가운 빗방울이 가득 맺혔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 한참을 버텼지만 구름 장막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 번진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로 빛나는 하코다테 야경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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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코다테가 제 아름다운 얼굴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구나 싶어 내려가는 로프웨이에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케이블카가 무거운 비구름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하코다테의 야경이 눈앞에 아찔하게 펼쳐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찬 비에 젖은 도심의 아스팔트와 바다가 불빛을 반사하는 풍경은, 마치 빛의 정령들이 만들어낸 동화 속 세계 같았다. 온전한 보석 상자는 아니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은 자에게만 허락된 비밀을 건네받은 듯 가슴이 뛰었다.

오타루 앞 바다, 이시키리만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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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으로 깨우는 바다 위의 아침
크루즈 선실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완벽한 자유와, 선상 위 지루할 틈 없는 축제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원하는 만큼의 행복과 시간으로 하루가 채워진다. 부산항을 떠난 뒤로 비가 계속됐다. 하지만 다채로운 선내 활동에 정신이 팔려, 바다를 바라보는 것조차 잊고 지냈다. 선실로 돌아와서도 발코니 문은 열지 않았다. 통창 너머로만 바다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밖, 바다는 한없이 깊고 아득했다. 밖은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안은 더없이 아늑했다. 밤새 비가 그치고 나면, 이 바다는 또 어떤 푸른빛을 보여줄까. 지금의 회색빛 바다는 앞으로 마주할 태양과 푸른 수평선을 위한 멋진 전주곡이리라. 어쩌면 이 고립이야말로, 바다가 건네는 진짜 휴식일지도 모른다.
그치지 않는 비에 날씨 요정이라도 나타나 주길 바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비 맞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비가 내려야 꽃이 피고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뜨는 법이니까. 이른 아침, 발코니로 나서자 마주한 풍경이 되레 낯설었다. 줄곧 이어지던 비가 그제야 비로소 멎어 있었다. 구름을 걷어낸 오타루 앞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천천히 깨웠다. 바다는 모든 것을 감추기도 모든 것을 드러내기도 하는 존재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갑판 위를 상쾌하게 스쳐 지나갔다.
◇ 낭만의 정거장, 오타루에 내리다

오타루역 4번 플랫폼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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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역 플랫폼에 발을 디디면 한 시대를 뜨겁게 풍미했던 전설적인 배우의 미소가 담긴 빛바랜 사진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그 사진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채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가만히 공유한다. 서정적이고 예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오타루역은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깊은 아날로그적 향수와 낭만을 건넨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스라한 그리움과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여정의 설렘이 교차하는 곳.
오타루는 그야말로 낭만의 정거장이다.

유리풍경이 걸린 사카이마치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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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머문 거리, 빛으로 피어나다
오타루의 거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투명한 종소리로 가득 찬다. 그 청량한 울림은 바람이라는 연주자가 오타루라는 거대한 악기를 연주하는 듯싶다. 겨울의 새하얀 낭만과는 다른, 초여름의 서정이 가득하다.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의 오타루는 비로소 숨겨두었던 속살을 수줍게 드러낸다.
한때 번성했던 항구의 흔적인 구 기무라 창고와 오랜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들이 고즈넉한 풍경을 이룬다. 시간이 멈춘 듯한 벽면마다 초록빛 이끼와 담쟁이넝쿨이 피어나 도시 전체가 온전히 보존된 거대한 아날로그 영화세트장처럼 고전적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무역항으로 번성하던 시절의 목조 건물과 서양식 석조은행 건물이 길게 늘어선 이 길에는 세월의 때가 묻은 것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기타이치 가리스 3호관 기타이치홀[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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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은 자연스레 사카이마치 거리로 이어진다. 거리의 외관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오타루의 진짜 매력이 숨겨져 있었다. 기타이치 가라스 3호관의 어두컴컴한 복도 바닥에는 130여 년 전 창고에서 청어를 실어 나르던 트롤리 선로가 세월의 흔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커다란 목조 공간 안, 기타이치홀에 167개의 주황빛 등유램프 불빛이 일렁이는 광경은 잠시 숨이 멎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거칠고 투박했던 홋카이도 오타루의 옛 기억이, 가장 현대적이고 로맨틱한 감성으로 완벽하게 피어나는 공간이었다.

오르골당 마스코트 '행운을 부르는 고양이'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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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추억을 소중히 담아둔 오르골당
이 매혹적인 거리에는 눈과 입을 사로잡는 달콤한 향기도 끊이지 않는다. 한번 맛보면 인생 케이크가 된다는 '르타오'(LeTAO)의 치즈케이크. 르타오라는 이름은 오타루(Otaru)의 글자 순서를 바꾼 것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로 '오타루의 친숙한 탑'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르타오 본점 예쁜 전망대는 누구나 올라 '사랑의 종'을 울릴 수 있는 행운의 명소다. 종을 치며 소원을 빌고, 탁 트인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양대 제과 브랜드인 '롯카테이'와 '기타카로'도 나란히 서서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르타오 본점 전망대 '사랑의 종'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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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마치 거리의 끝, 메르헨 교차로에 다다르면 세계 각국의 오르골이 모여 있는 전설적인 오르골당과 마주하게 된다. 입구의 증기 시계가 15분마다 맑은 멜로디와 함께 하얀 증기를 뿜어내며 거리에 낭만을 더한다. 오르골당 본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감촉과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 세월의 향기가 푸근하게 감싸 안는다.
목조 대들보 아래로 내려앉은 노란 조명을 받아 수만 개의 오르골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빛바랜 나무 천장과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유리·크리스털 오르골의 조화는 마치 오래된 비밀 창고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감긴 태엽이 부드럽게 풀리며 흘러나오는 투명한 멜로디는 정체 모를 향수와 함께 따스한 아날로그적 위로를 건넨다. 오르골당은 우리 모두의 추억을 소중히 담아둔 기억의 상자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언덕길, 후나미자카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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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도 괜찮다고, 오타루가 건네는 말
오타루 여행의 묘미는 이름 없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구 테미야선의 낡은 철길, 아담한 카페에서 디저트를 맛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타루에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저 세월의 때가 묻은 거리를 느릿하게 걷는 나만의 속도만 존재할 뿐이다.
겨울을 가득 채웠던 하얀 눈송이가 흔적 없이 사라진 운하 거리를 걷는 일은 화려한 분장을 지워낸 옛 배우의 진짜 표정을 마주하는 것만 같다. 이곳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영화 '러브레터'의 아련한 배경지다. 오타루 운하는 빛과 세월이 만들어낸 물리적 흔적이 배어 있는 빈티지한 아날로그 사진을 닮았다. 오래된 운하와 오르골당, 석조 창고는 디지털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세월을 품고 있다. 100년 전 붉은 벽돌과 가스등이 여전히 고즈넉한 온기를 만든다. 오타루는 조금 낡고 멈추어 선 것들에게도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오타루 운하 야경 [사진/정동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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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웠어, 오타루
어둠이 내린 오타루는 은은한 63개의 가스등 불빛만 남긴 채 이내 고요해진다. 운하를 따라 느릿하게 걸으며 자연스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거리는 마침내 숨겨두었던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러브레터'의 대사 "오겡키데스카"라는 안부는 운하의 물결을 타고, 결국 '내가 정말로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을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치유의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어쩌면 오타루는 외로움과 치유라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이미 완성된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감독이 이곳을 감성 영화의 배경지로 탐내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비바람을 견디고 당도한 이 길 끝에서 어둠이 번지는 밤 풍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다짐해 본다. 겨울이면 새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아 고즈넉함에 깊은 운치를 더해줄 이 아름다운 운하를, 언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찾으리라고. 그리하여 오타루는 그리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진정한 낭만의 정거장으로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것은 묵혀둔 꿈과 호기심이었다. 처음 그대로, 이 여정의 끝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고마웠어, 나의 오타루.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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