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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반대진영 책도 탐독한 "현실적 지식인"…'스탈린의 서재'
입력 2024.03.28 12:56수정 2024.03.28 12:56조회수 0댓글 0

영국의 소련사 전문가가 출간…독서하며 남긴 메모·표시 수백점
"역사서 즐겨 읽고 마르크스-레닌에 진심"…미국 헌법도 참고


크렘린 집무실에서 일하는 생전 스탈린(1938)

[너머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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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29년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평생 책을 열성적으로 모았다. 하루 수백 쪽을 읽기도 한 책벌레였다. 그의 책은 모스크바 다차(시골 별장)를 비롯한 여러 인접 건물에 나뉘어 있었다. 그는 1953년 3월 이 다차의 서재 소파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남긴 장서는 2만5천권에 달했다.

소련 역사 전문가인 영국의 석학 제프리 로버츠가 쓴 '스탈린의 서재'(너머북스)는 냉혹한 독재자로 불리는 스탈린의 장서(藏書)를 통해 그의 삶과 소련 시대 핵심 시기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그에 대한 이분법적 평가인 '잔혹한 폭군', '현실정치가'란 틀에서 벗어나 "책과 사상에 마음을 쏟은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에 역점을 둔다. 스탈린은 방황하는 아들 바실리에게 역사, 문학, 군사 업무에 관한 책을 가리키며 "내 나이가 칠십이란다. 하지만 난 지금도 계속 배우는 중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탈린과 두 자녀 바실리(맨 왼쪽), 스베틀라나(가운데)

[너머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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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남긴 장서는 이후 여러 도서관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공산당 기록보관소에 중요한 자취가 남았다.

저자는 이를 추적해 스탈린이 읽은 책은 무엇이며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책은 스탈린을 사회주의로 전향하게 했으며, 차르 러시아의 혁명적 지하 세계로 인도했다."

독서광 스탈린은 많은 책에 밑줄을 긋고 메모와 '포멧키'(pometki·책에 남긴 표시)를 달았다. 길고 짧은 텍스트는 400여 점에 이른다.

그는 여백에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레기', '꺼져' 같은 경멸의 표현부터 '동의함', '정확해', '옳아', '하하' 같은 표시로 생각과 신념, 감정을 드러냈다.

스탈린이 1925년 직접 짠 도서 분류체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사는 철학, 역사, 정치경제학, 군사문제 등 방대했다. 레닌, 마르크스, 엥겔스 등은 인명별로 따로 정리하도록 했다. 소설, 희곡, 시집 같은 문학작품도 두루 읽었다.

스탈린이 손으로 쓴 장서 분류 체계(19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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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장 좋아한 주제는 역사였다. 의외로 비(非)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로베르트 비페르의 고대 유럽에 관한 저서를 즐겨 읽었다. 스탈린은 고대 그리스 도시 스파르타의 군사력, 정치구조, 외교적 책략 등에 관심을 뒀다. 로마 제국에 관한 비페르의 책은 스탈린 컬렉션 전체에서 표시가 가장 많았다. 러시아의 차르 통치, 특히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의 교훈에도 열중했다.

평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었다. 레닌을 숭배했고, 그의 장서에는 레닌의 저술이 수백권이었다. 연설문을 직접 작성했던 그는 레닌 인용의 대가로도 유명했다.

스탈린은 정적(政敵)의 글도 탐독했다. 치열하게 권력 승계 투쟁을 벌인 트로츠키를 인명별 분류 6번째에 뒀다.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스탈린은 '동의' 표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볼셰비키의 폭력 혁명을 비판한 카우츠키의 저서에는 '거짓말쟁이', '바보' 등 경멸조의 코멘트를 달았다.

'스탈린의 서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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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정운영을 위해선 이념적으로 반대 진영의 지도자나 국가도 탐구했다. 19세기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회고록을 닳도록 읽었다. 자신처럼 역사를 좋아한 윈스턴 처칠 영국 전 총리를 높이 평가했다. 연방제를 택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헌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스탈린은 1936년 새 헌법 초안을 만들 때 미국 헌법을 참고했다고 한다. '부르주아 국가의 헌법들'이란 책에 적힌 포멧키가 이를 보여준다.

스탈린은 레프 톨스토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윌리엄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등 러시아와 서구 작가들의 고전 소설도 탐독했다. 스탈린은 1934년 작가를 '인간 영혼의 기사'로 칭했으나 문학을 공산주의 이념에 완전히 종속시킬 순 없다고 봤다.

스탈린이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1942년 희곡 '이반 뇌제'의 뒤표지에 남긴 낙서.

[너머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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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전쟁과 혁명, 제1차 5개년 계획, 1930년대 반대파를 축출한 대숙청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책의 교훈에 의지했다.

군사 전략은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였고 소련과 유럽의 전략 이론가들이 쓴 저술을 모아 읽었다. 18세기 전략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와 1812년 나폴레옹을 물리친 미하일 쿠투조프 원수 같은 차르의 영웅적 장군들을 찬양했다. 스탈린이 소련 최고사령관이 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때에도 참고한 책은 '쿠투조프 사령관'이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출간에 앞서 출판사와 한 인터뷰에서 "스탈린은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정치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책을 읽는 현실적인 지식인이었다"며 "그의 관심사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헌법에 관한 책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를 "대숙청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키는 것"이라고 꼽으며 "(대규모 탄압은) 적과의 투쟁에 대한 이념적 차원의 신념뿐 아니라 그의 정서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김남섭 옮김. 554쪽.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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